본편 - [고스트 바둑왕] 선생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홀로 완벽한 존재라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지, 그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후지사키 겐조는 자신의 손주가 비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단하구나… 어떻게 이런 수를…….”

 

 눈앞에 놓인 까만 돌을 바라보다 손주를 돌아보았다. 겐조의 손주인 키요시는 머뭇거리며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멋대로 초콜렛을 흘린 것에 대해 혼이 날까 그런 모양이다 생각했지만, 작은 손을 들어 몇 개의 초콜렛과 돌을 담고 조물거리기 시작하자 겐조는 아이를 달리 보았다. 조금 전 사람들이 두던 묘수 풀이를 아이가 조금씩 풀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하나만 두면 되는 거였다. 이리 두고 저리 둘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돌만 남겨두면 되는 거였는데 그 방법을 찾지 못해 다들 쑥덕거리고 있던 차였단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린 자신의 손주가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군!”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런 겐조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몇몇 이들이 수군댔다. 저게 어째서 묘수요? 나도 몰러. 그러니까…. 웅성거림을 알았는지 아이가 몇 개의 돌을 다시 흩뿌렸다가 주섬주섬 주워담고, 제자리에 돌을 두었다. ‘제자리’에 두었다는 말은, 바로 이게 그렇게나 어렵다던 묘수 풀이라고 그걸 자신이 엊그제 몇 시간에 걸쳐 풀어냈다며 겐조가 거들먹거리듯 낸 어려운 묘수 풀이 문제를 완벽히, 그러니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해 떠든 것을 모두 듣고 이해한 것마냥 하나씩 풀어 ‘정답의 위치’에 두어냈다는 말이다.

 

 “키요시, 네가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단다!”

 

 겐조는 흥분해서 자신의 손주에게 한가득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겐조의 손이 토닥토닥 장하다는 듯이 아이의 등을 치대자 아이가 돌 몇 개를 다시 떨어뜨리며 바둑판 위에서 손을 떼었다. 그제서야 주변에 있던 이들이 왜 그 한 수가 정답이 될 수 있었는지 깨닫고 탄성을 내질렀다. 오, 이렇게 두는 방법이. 쑥덕이는 사람들 틈새로 겐조가 바둑 선생에게 손짓했다.

 

 “아시와라 선생님, 키요시가 둔 수를 좀 보세요!”

 

 프로 바둑 기사에게 예를 차리지도 못하고 흥분해서 서둘러 오라며 손짓을 하고야 만 것이지만 프로 바둑 기사는 워낙에 주위가 소란스러웠기에 기분 나쁜 것을 느낄 새도 없이 무슨 일이 있는가싶어 서둘러 겐조에게 다가왔다.

 

 보자마자 아시와라는 눈을 크게 떴다. ‘도우야 아키라’라는 명인의 아들이 고민했을 법한 묘수다 어쩐다 말이 많았지만 아시와라에게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수놓인 돌의 위치가 절묘했다. 명인의 아래서 배우는 만큼 그의 아들인 ‘도우야 아키라’가 이 묘수를 푸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비슷한 묘수를 풀게 되는 제법 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푸는 것은, 그러니까 단 하나의 수를 보면 얼핏 정석과도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이 수는….

 

 “제법이군요!”

 

 흥미로웠다. 마치 아이들 눈높이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제법 재밌는 수랄까. 그래, 오목 같은. 우연일까? 아시와라가 반짝이는 눈으로 아이, 키요시를 주시하였다. 어찌되었든 이런 풀이를 해낼 줄 아는 아이라면…….

 

 “키요시. 이번에 어린이 바둑대회가 열린다던데, 나가볼 생각 없니?”

 

 기대를 걸어봐도 되겠지. 아시와라는 들뜬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뚱하니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작은 편이었다. 설마하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아시와라가 다시 한 번 눈높이를 맞추며 되물었다.

 

 “상대가 될 애가 없다고?”

 

 하려던 말이 이것이 맞았을까? 아이가 입을 벙긋거리는데, 아이의 뒤편에서 그 할아버지인 겐조가 잔뜩 들떠서 아이를 다그쳤다.

 

 “그래! 키요시!”

 

 그에 힘입어 아시와라는 다시 한 번 키요시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키요시, 거기 가면 분명 너도 즐겁게 바둑을 둘 수 있을 거야.”

 

 “…전혀 안…….”

 

 잘 들리지 않았다. 주변이 워낙에 시끌거려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아시와라가 다시 되물었다.

 

 “전혀? 전혀 그럴 상대가 없을 것 같다고?”

 

 아이가 뚱하니 입을 다물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시와라는 아이가 대회에 나가지 않을 거라고 끝까지 거부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하였으나, 그런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은 아주 저들끼리 세기의 천재가 또 나왔다며 시끌벅적이었다. 불안하게 아이를 살피는 사이 아시와라는 보았다.

 

 마지못해 대회에 가겠다며 끄덕여지는 아이의 고개를 말이다. 기쁨에 아시와라가 환하게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가면 또래 아이들도 많아서 재밌을 거란다!”

 

 잠깐 ‘아키라’라는 예외의 인물이 떠올랐지만 설마, 아시와라는 이 아이가 그보다 더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였다.

 

 

 

 

 대회 당일, 아시와라는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후지사키 키요시, 그 아이가 하는 행동들을.

 

 “뭘 보고 있나?”

 

 안경을 쓴 사내, 오가타가 굳이 본인은 올 힐요가 없는 여기까지 따라나선 사제 격의 후배 아시와라에게 묻고 그 눈길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한 아이가 있었다. 뚱한 표정의 아이는 그 할아버지로 보이는 자의 손을 잡고 자신이 대국할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꼬마애?”

 

 의아하다는 오가타의 음성에 아시와라가 웃으며 답하였다.

 

 “이번에 기대하고 있는 아입니다.”

 

 그래? 기대라…. 오가타가 작게 중얼거리며 아이를 따라 잠시 시선을 두더니 이내 아시와라에게 대충 인사하곤 자리를 떴다.

 

 “그렇게 대단한 아이면 또 볼 날이 있겠지. 굳이 계속 지켜볼 필요도 없어.”

 

 “하하하.”

 

 설렁설렁한 선배기사의 대꾸에 아시와라는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꽤나 집요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아시와라는 그와 함께 보낸 수 년 간의 세월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단계씩 아이들을 제쳐가는 키요시의 모습을 아시와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키요시의 손이 어색하게 돌을 쥐다가 상대의 손을 보고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이내 고쳐쥔 돌을 머뭇거리며 놓으려는데, 어떤 아이가 다가가 크게 소리쳤다.

 

 “아~ 아깝다!”

 

 그 말에 흠칫하며 키요시가 고개를 들었다. 어색하게 두느라 잘못 둔 수를 콕 집어서 이야기한 아이의 실력도 실력인지라 아시와라는 크게 놀랐다. 얼핏 본 것만으로 스쳐지나가다 저렇게 훈수를 두다니. 아, 물론 훈수를 둔 것 자체도 놀라긴 했다. 대회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규칙을 어길 생각을 하다니? 담이 큰 아이로군.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 있던 관계자에 의해 아이가 끌려갔다. 그럼에도 아시와라는 키요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멀리 잡혀가는 아이를 보는 키요시의 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불타고 있었기에.

 

 승부욕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바둑에 관해 꽤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보였다.

 

 

 

 

 키요시, 그 아이는 정말이지 특별하다는 것을 아시와라는 새삼 느꼈다. 두면 둘수록 상대방의 기술을 흡수해가는 듯한 느낌. 그는 새삼 궁금해졌다.

 

 이 아이는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까?

 

 아키라만큼이나 궁금한 아이다. 역시 네가 이길 줄 알았다며 기쁜 얼굴로 키요시를 끌어안는 겐조를 보고 아시와라는 잠시 시계를 보았다. 처음엔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제 돌 쥐는 법마저도 익숙해진 듯보였다. 아주 잠시의 시간만에 말이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 속도로 돌을 두고 실수인가싶은 돌마저도 살려내는 기이한 아이. 바둑을 배운 적이 없다고 했던가? 아니, 2살 때부터 할아버지인 겐조 씨와 함께 두었다고는 들은 것 같다.

 

 아시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기대할 만한 아이다.

 

 상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승부욕은 있으나 이기지를 못하는 아이가 종종 보이는 현상이었고, 이러한 대회에서는 왕왕 있는 일이었다.

 

 “키요시, 역시 네가 이길 줄 알았단다.”

 

 그것이 신경 쓰이는지 상대 아이를 힐끔거리는 키요시에 겐조는 그 등을 다독이며 장하다고 얼싸안아주었다. 그러나 키요시는 미묘한 표정으로 겐조를 밀어냈다. 겐조는 아이의 뜻을 단번에 알아채고 환히 웃었다.

 

 “기특하구나! 다른 아이를 걱정할 줄도 알고. 아직 대국이 끝나지 않은 아이도 있는데….”

 

 알려줘서 고맙다, 키요시. 그래도 아이가 여전히 불편한 마음을 가진 것이 훤히 보여서 겐조는 괜스레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려 소곤소곤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다음 대국도 자신 있니?”

 

 그게 간지러웠는지 다시 원래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 귀를 긁적이는 키요시에 겐조는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머리를 잔뜩 썼으니만큼 단백질 풍부한 음식을 먹이는 게 좋겠지! 그래, 낫토가 좋겠군.

 

 

 

 

 아까 그 아이들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시무룩한 얼굴로 낫토를 깨작거리는 키요시의 모습에 겐조는 그 등을 쓸며 애써 밝은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긴장할 필요 없어. 키요시, 네 실력이라면! 우승까지도 문제 없다!”

 

 암, 그렇고 말고. 과장되게 이야기하자 아이가 고개를 들어 눈을 굴렸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큼큼 거리는 게 귀여워서 겐조는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저를 놀리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아이의 표정이 다시 뚱하게 바뀌었다. 그래도 겐조에게는 마냥 귀엽기만한 손주였기에 뿌듯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결심이 섰는지 젓가락을 내려놓는 키요시의 모습에 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먹었니? 가자꾸나.”

 

 기합이 잔뜩 들어갔군. 역시 대회에 데려오길 잘했어. 겐조는 작게 중얼거리며 대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키요시를 바라보며 수군대는 것이, 분명 제 손주의 대단함을 알아본 것이라 여겼다. 굳어있는 키요시를 돌려세워 저 멀리 보이는 자리를 가리켰다. 다음 상대인, 키요시보다 두어 살 많아보이는 사내애였다.

 

 “다음 대국은 저 자리에서, 저 아이와 두게 될 거란다.”

 

 어서 가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발을 떼지 못하는 아이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런 겐조에게 힘을 입었는지 자그마한 것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뗀다. 고것이 귀여워 겐조가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우승까지 가야 우리 키요시가 만족하겠지? 절로 신이 난 기분에 김칫국을 마시는 것 같았지만 알 게 뭔가. 겐조의 눈에는 누가 뭐래도 키요시, 자신의 손주가 최고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승부욕을 불태우는 상대편 아이와 마주하자마자 뚫어져라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승부욕하면 우리 키요시도 못지 않지. 암. 다만 걱정은 마음이 약한 자신의 손주가 상대편 아이의 울상이 된 모습에 속상해할까… 그래서 마음이 불편해 안절부절 못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시무룩하게 있는 손주의 모습에 겐조는 애써 밝게 이야기했다.

 

 “흠! 역시 우리 키요시를 이길 아이는 여기 없나보군!”

 

 그제야 고개를 든 키요시가 울망이는 눈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겐조는 그에 힘입어 꼬옥 자신의 손주를 끌어안아 어화둥둥 달랬다.

 

 “키요시의 실력을 더 펼칠 곳이 필요하겠어.”

 

 그래, 이번 3월에 원생 시험이 있댔지. 겐조가 고개를 주억이며 키요시와 눈을 맞추었다.

 

 “거기서 네 실력을 보여주자꾸나.”

 

 아이는 여전히 시무룩해보였지만 입을 비죽이며 무어라 말하려 하는 것이 그래도 불편하던 속이 좀 풀린 모양이다. 겐조가 웃으며 키요시를 꼭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뒤, 원생시험을 치르기 위해 일본바둑기원을 찾은 겐조는 그간 기원에 데리고 다니며 바둑을 두게 해주며 느낀 바가 있었다.

 

 우리 키요시는 천재다!

 

 다른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실력 있는 아마추어 기사들 몇을 이겨낸 것이다. 사실 원생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까진 괜한 호들갑이 아닌가 싶었으나 이것으로 그는 마음을 굳혔다.

 

 손주가 학교에서 모든 시험마다 만점을 받아올 때도 이 만큼 기특하고 설레지는 않았다. 될성부른 아이. 겐조의 친구들이 이야기하던 말이 맞았다. 키요시는 장차 크게 될 떡잎이었다.

 

 그리하야 초등학교 6학년의 3월, 후지사키 키요시가 본격적으로 발돋움을 하게 된 때였다.

 

 

 

 

 원생 아이들이 시끌시끌했다. 이스미, 와야, 후쿠. 원생 중에서도 제법 바둑을 둔다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완전히 발렸어~”

 

 “응… 성격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한 건 틀림없었지.”

 

 와아, 후쿠, 이스미 순으로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가장 처음 그 아이와 두었던 이스미는 아이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내가 먼저야?’

 

 당연히 자신이 흰 돌이어야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까만 돌로 먼저 두는 것은 처음이란 듯이 생소한 모습으로 말이다. 먼저 두라는 말에, 그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 한수를 버리겠다는 듯 바둑판 한 가운데에 두었다.

 

 심지어는 긴장한 기색 없이 무료한 표정으로 눈가를 비빈다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이 졸면서 두는 것도 같았다. 작게 코웃음을 치던 것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자식….”

 

 와야는 아직도 화가 나는 지 씩씩 거리며 욕하듯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재꼈다.

 

 “후지사키 키요시랬지? 다음에 보면 가만 안 둬.”

 

 “음… 그치만 이길 수 있을까…?”

 

 씩씩대는 와야의 말에 후쿠가 찬물을 끼얹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발언이었다. 와야는 입을 꾹 다물고는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이번 대국에서 워낙 큰 격차를 느꼈기에 셋은 그 누구도 본인들의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겐조는 손주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막힘없이 그려나가는 손주의 첫 기보를 바라보았다.

 

 “음….”

 

 비록 ‘후지사키 키요시’라는 이름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악필이긴 하지만 어디에 흰돌을 두었고 어디에 흑돌 두었는지 그게 몇 번째 수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으니 된 것 아닐까. 아직 어리니 글씨 정도야 못 쓸 수도 있는 법이다. 사람이 어떻게 다 완벽하겠는가? 그럼, 그럼. 겐조가 기특한 마음만을 가진 채 고개를 주억였다.

 

 “좀 악필이긴 하지만 알아볼 수는 있으니. 3국 모두 불계승이로군요!”

 

 원생 아이들을 상대로 대단하다며 눈을 빛내는 시험관의 말에 겐조의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아무렴, 누구 손주인데. 손주 또한 저와 다름 없이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고 겐조는 시선을 돌렸다가 멈칫했다.

 

 “키요시, 이녀석…!”

 

 손주의 표정에서 못마땅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의아함도 잠시, 그 속내를 알아챈 겐조가 벅찬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바로 프로 시험이 보고 싶은 게로구나!”

 

 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는데! 겐조가 크게 웃으며 긍정적인 대답을 내어놓는 시험관에게 자랑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장차 명인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

 

 “든든한 손주를 두셨습니다!”

 

 시험관과 겐조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키요시는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뚱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묻혀 그것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치는 프로시험이긴 하지만 예선이니까 자신이 제일 잘 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인 이들을 보니 장장한 이들이 많아 자신이 없어졌다. 할아버지께 잘 둔다고 세기의 천재라고 칭찬도 많이 들은 데다가, 본인 스스로도 자신감이 넘쳐 부모님께 단번에 합격할 것이라 자랑까지 했는데. 오치가 울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지르물었다. 그 순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

 

 지루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지루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이야? 오치는 짜증이 났다. 매서운 눈초리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았다. 저보다 끽해야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어린애가 무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분명 원생이겠지? 그러니까 저리 당당할 테다. 다만 오치가 잘못 안 것이 있다. 원생은 예선 없이 순위에 따라 바로 프로시험을 치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아직은 어설프게 원생의 존재에 대해서만 알고 있던 어린 오치는 단단히 오해했다.

 

 저렇게 자만하다니. 자신도 여기서 떨어진다면 원생으로 들어가서 다시 제대로 공부해서 시험을 볼 테다. 기왕이면 저 짜증나는 녀석도 주제를 알고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멈칫하고 고개를 저었다. 떨어질 거라는 생각을 왜 해? 나는 붙을 거야! 저 건방진 녀석의 코도 짓눌러주겠어!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오치는 얼마 두지 못하고 예선에서 탈락하였고, 후지사키 키요시라고 하였던 그 아이는 연승무패의 기록으로 프로시험에 합격하였다. 오치는 딱 한 번 마주했을 뿐인 그 아이에게 지독한 패배감을 느꼈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당당하게 신인 프로 바둑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 봄, 카이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키시모토는 그 아이를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바둑특례입학을 하게 되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으나 사실은 한사코 ‘특혜를 받을 수는 없다’며 거부하는 아이의 부모님 덕에 제 실력으로 정당히 입학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된 아이였기에. 이제 3학년이 되어 바둑부 부장으로서 고문선생님께 언질을 받은 적이 있는 터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너는….”

 

 그런데 그 아이가 바둑부에? 굳이 특례입학이 아니라면 바둑부에 들를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니면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걸까? 바둑부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아이의 모습에 키시모토가 아이의 어깨를 짚어 제 쪽으로 주의를 집중시켰다.

 

 “너는 이번에 프로가 됐다는 그 아이구나.”

 

 프로기사는 학생들의 바둑부에 들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때문에 바둑부에 들기 위해 온 것은 아닐 테고. 잠시 고민에 빠진 사이 키요시의 어깨를 짚은 손에서 잔떨림이 느껴졌다. 설마, 비웃는 것인가? 키시모토는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우리도 진지해. 그렇게 비웃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이번에 들어온 도우야 아키라도….”

 

 아. 키시모토가 속으로 탄식했다. 그제야 키요시의 시선 끝에 자리한 것이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 끝맺지 못한 말을 이으며 키시모토는 안경을 고쳐썼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못마땅한 마음 그대로 키요시라는 아이를 내려다보곤 아이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주었다. 도우야 아키라. 단정한 단발의, 후지사키 키요시 또래의 아이. 아무래도 관심이 있는 건 바둑부가 아니라 역시 저 녀석 쪽이었던 모양이다. 속이 쓰리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했다.

 

 “그래. 어쩌면 너라면 도우야 아키라에게 상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키시모토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한 그의 시야에는 주먹을 꽉 쥔 채 아키라를 눈으로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빤하게 응시하고 있는 키요시가 있었다.

 

 

 

 

 “드디어 정식 프로기사로서 첫 대국일이 잡혔구나!”

 

 키요시를 아들로 둔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이 난 겐조의 말에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아이를 보았다. 키요시가 안 그래도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프로기사가 되면 학교를 더 많이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또래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한 채로, 제대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프로바둑기사라는 허울 좋은 직업만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프로가 되면 학교를 많이 빠지게 될 건데… 정말 괜찮니, 키요시?”

 

 “네.”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곧은 표정으로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바둑에 진심이라며 겐조가 칭찬을 아끼지 않자 부끄러웠는지 키요시가 후다닥 방으로 올라갔다.

 

 “그래! 어서 올라가서 바둑공부를 하렴!”

 

 아버님도 참. 아이의 어머니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작게 웃었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어머니의 눈에는 그저 말도 늦게 튼 아직 어리숙한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히다카는 분명 오늘 부활동을 마치고 나면 지도기를 두어주겠다던 도우야 아키라를 찾아 이리저리 교실을 찾아헤맸다. 그런데 보이라는 아키라는 보이지 않고 저 멀리 바둑부 창고실에서 큰 소란과 함께 애먼 다른 아이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혹여 바둑부 관련으로 사단이라도 날까 서둘러 걸음을 옮겨간 곳엔 낯설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어, 너는….”

 

 누군가 했더니 소문으로만 듣던 아이 ‘후지사키 키요시’였던 것이다. 생각보다 키가 작네?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는 아이의 모습에 히다카는 잠시 멈칫했다. 화가 났나? 왜? 작은 덩치와는 달리 서슬퍼런 인상에 조금 움찔하는데 그런 히다카의 시야에 창고실 안의 풍경이 들어왔다.

 

 “이게 무슨… 너희, 뭐하고 있는 거야?”

 

 히다카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두어명의 1, 2학년들이 다름아닌 저가 찾고 있던 아키라를 괴롭히고 있던 것이었다. 식은땀으로 창백하게 질린 도우야의 안색이나 짓굳은 나머지 아이들의 표정… 이건 딱 봐도 따돌리려는 장면을 후지사키 키요시라는 아이가 목격하고 제재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토우랑 코지마… 그리고 넌 1학년이지?”

 

 아키라를 괴롭히고 있던 세 아이들을 콕 집으며, 어설픈 변명을 하려는 그 아이들을 무시하고 크게 화를 내었다.

 

 “멍청이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러나 화를 낸 이유 중에는 그 아이들뿐만 아니라 도우야 아키라에 관한 것도 있었다. 뻔하게 보이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도 머리가 좋은 아이인데 말이다. 씩씩 한참을 화를 내며 상황을 정리하던 히다카는 어느정도 진정이 되고 나서 아차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코앞의 상황에 눈이 돌아가서 또 다른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심지어 그 아이가 저보다도 먼저 아키라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깜빡하고 만 것이다.

 

 “말려줘서 고마워. 후지사키 키요시랬나?”

 

 마주한 아이의 눈동자는 매서웠으나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진 상태였다. 역시, 키요시라는 아이도 분명 조금 전의 상황이 화가 났던 것이겠지. 히다카가 웃으며 그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무서운 인상과는 다르게 상냥하구나? 얼굴도… 아키라만큼은 아니지만 나중에 크면 사람 꽤나 울릴 것 같은 제법 잘생긴 인상이었다.

 

 “이제 나한테 맡기고 너는 가도 돼. 고마웠어.”

 

 히다카의 말에 아이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걸음을 돌렸다. 그것을 본 아키라가 서둘러 달려와 멀어져가는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괴롭힘 따위 자신의 실력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며 무모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아 멍때리고 있다가, 히다카 선배의 말에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고마운 마음에 인사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후지사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아버지와 다른 프로들이 바둑토론을 할 때면 아시와라 씨가 여러 번 이야기한 적 있는 ‘눈에 띄는 아이’였으니까. 그냥, 기회가 된다면 언제 한 번 두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꽤 많은 칭찬을 들었더랬지. 그런데 그 아이가 저를 도와주기까지 하다니.

 

 “고마워, 네 이름… 기억할게!”

 

 후지사키 키요시. 관심이 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키라의 특성 상 이름을 외운다는 것은 제법 특별한 일이었다. 음, 부끄러운 걸까? 왠지 모르게 키요시의 걸음이 빨라진 것 같음에 아키라가 설핏 웃었다.

 

 

 

 

 “우리 키요시, 가서 떨지 말고 잘 해야한다!”

 

 겐조는 긴장했다. 손주가 대국을 하러 가는 건데 왜 자신이 더 떨리는지. 덤덤한 손주를 바라보다 애궂은 손주의 옷매무새만 고쳐주었다. 긴장되는 것은 자신뿐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키요시의 모습에 겐조가 어흠, 헛기침을 하곤 손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본원 안쪽으로 슬며시 보내주었다. 더 붙잡고 있었다가는 손주가 늦을 테니까.

 

 상대가 장장한 노인네이니만큼 키요시를 잘 대해주면 좋으련만. 평소 좋아하던 바둑기사 구와바라가 대국상대라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겐조였다. 상대를 골리며 이겨내는 그의 특성을 알기에 이번만큼은 구와바라를 응원할 수 없었다. 욕하면 욕했지.

 

 

 

 

 신초단이라. 구와바라는 그간 몇 번 두어본 적 있는 지난 신초단 명단들을 되새겨보았지만 제 상대로 오가타나 다른 두엇의 기사 빼고는 제법 인상이 깊은 인물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만큼 인상이 깊게 남을 아이는 처음이라 해야할까.

 

 “꼬마야, 네 이름이 무엇인고?”

 

 “…후지사키 키요시입니다.”

 

 구와바라의 물음에 유현의 방을 나서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덤덤한 말투로 제 이름을 내뱉는 것이 그 어떤 동요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나 함정을 파고 기묘한 수로 평정심을 무너뜨려보려 했으나 함정에 빠지긴커녕 되레 제 검날을 들이밀던 아이가. 이 정도 했으면 상대는 오가타처럼 한껏 약올라 오기 띈 눈빛이라도 보낸다던가, 아니면 다른 이들처럼 철저한 패배감을 보이고 끝났을 텐데…….

 

 이상하지, 분명 마지막에 검날을 들이민 것은 그 아인데 그 손잡이는 돌연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손에 쥐여진 모양새니. 마치 고의로 검날을 본인 쪽으로 돌린 것처럼.

 

 얼떨결에 승리하게 된 구와바라는 말을 잃고 잠시간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한참을 말이 없자 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의아한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마치 그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로 말이다.

 

 “그럴 리가.”

 

 구와바라가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모른 채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럴 실력도 아니었거니와. 구와바라는 그 특허의 웃음도 짓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저 또한 유현의 방을 빠져나갔다. 새로운 파도가 목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아니, 이미 그에 치여 나동그라진 것일지도.

 

 

 

 

 24연승. 벌써부터 늘어난 대국량에 무리가 될 법도 하건만 후지사키 키요시는 승승장구였다. 저들이 숙덕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대국실을 나서는 키요시의 모습에 이노치는 입가를 씰룩였다.

 

 “웃는 것 좀 봐. 진짜 얄밉다.”

 

 누가 확, 저 건방진 꼬맹이 코 좀 꺾어줬으면 좋겠다.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씩씩대는 것은 절대로 자신이 그 아이에게 무참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노치가 심술을 부리는데 옆에서 그의 친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봤자 도우야 아키라만하겠냐.”

 

 저 꼬마와 대국해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 분명했다. 울컥해서 소리치려는데 친구의 안색이 사색이 되어 이노치를 다그친다. 야야, 그만 하고 저기 봐. 그 작은 속삭임에 고개를 틀자 키요시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소름이 끼쳐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제 얘기할 땐 꿈쩍도 않더니 도우야 아키라 소리 나오자마자 고개 돌리는 거 봐라.”

 

 라이벌이라 이거지. 친구가 한 번 더 코웃음 치는 데에 그친 반면 이노치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며 분을 삼켜야만 했다. 망할 꼬맹이들! 결코 이것은 그가 두 아이에게 모두 처참히 졌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두 꼬맹이가 모두 건방지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의 화가 삭혀지지 않아 내는 작은 심통일 뿐이다.

 

 

 

 

 신인 바둑기사 축하기념 기도기 행사에서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야?”

 

 “후지사키 2단이랑 도우야 2단이 지금 대국한다는데?”

 

 “뭐? 그런 건 빨리 말해야지!”

 

 최근들어 유명한 바둑계의 최대 유망주 두 사람이 갑작스레 대국을 한다니!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하도 사람이 몰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어린 기사들이 진지하게 대국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였다.

 

 얼마 안 있어서 한 사람의 고개가 숙여진다.

 

 “졌습니다….”

 

 도우야 2단이었다. 한참이나 숙여진 도우야 2단의 정수리를 후지사키 2단은 말 없이 지켜보았다. 자신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한 덤덤한 태도였다.

 

 둘이 서로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도우야 2단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것이 우스웠을까? 후지사키 2단이 시선을 돌리며 입을 벌려 숨을 쉬었다.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인 것으로 보아 하품이라도 한 것인가? 도우야 2단의 눈초리가 더 사나워졌지만 후지사키 2단은 아랑곳않고 자리를 떴다.

 

 많은 이들이 후지사키 2단과 도우야 2단의 지도기를 기대하였으나 그 대국 이후로 두 사람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대국이 있다. 후지사키 2단과 도우야 2단의 대국 말이다. 과연 지난 비공식 대국에서 치루었던 설욕을 도우야 2단이 만회할 수 있을 것인가? 모두의 관심사였다.

 

 “드디어 다시 너와 두는구나.”

 

 아키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떼었다. 돌그릇을 쥐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꿀꺽 삼켜지는 침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크게 들려온다. 아키라의 선전포고에도 덤덤하던 키요시는 이내, 아키라가 돌을 쏟는 것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와장창 쏟아지는 돌들에 아키라는 아차하였으나 굳어 있는 저보다도 먼저 돌을 쓸어담아주는 키요시의 행동에 복잡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제 앞에서 대국 후에 하품을 하던 모습이나, 반대로 학교에서 바둑부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 도와주던 모습이나….

 

 “너는 상냥한 건지, 건방진 건지 모르겠어.”

 

 아키라는 무심코 내뱉고는 멈칫했으나, 아키라의 말에 부끄러운 것처럼 괜스레 귓가를 긁는 키요시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알 수 없는 아이.

 

 그 생각은 대국이 끝나고서 더욱 심해졌다.

 

 “졌습니다.”

 

 “뭐…?”

 

 이제 막 대국에 불이 붙을 찰나였다. 눈앞에 숙여진 키요시의 머리에 아키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졌다고? 어째서? 아키라가 툭하니 돌을 떨어뜨렸다. 그에 아랑곳않고 키요시는 제멋대로 돌을 정리하여 자리를 뜰 뿐이었다.

 

 “어째서…! 봐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키라가 키요시를 붙잡고 물었다. 그 모습이 절절하여 키요시는 하마터면 미안하다고 할 뻔했다. 아키라의 손을 천천히 뿌리친 채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야.”

 

 무엇이 여기까지라는 걸까? 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일까? 아키라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빠르게 멀어져가는 키요시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도우야 고요에게는 아들이 있다. 도우야 아키라, 전도유망한 바둑계의 신성. 그 이명과는 달리 또래 중에는 견줄 아이들이 없어 늘 외로워하던 아이.

 

 “너구나, 아키라를 이겼다는 아이가.”

 

 그런데 그런 자신의 아들을 이겼다? 고요의 눈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후지사키 키요시를 향했다. 마침 본원에 들를 일이 있어 우연찮게 지나다가 마주한 것이었다. 아키라의 일뿐만 아니라 저번 신초단 때의 일 때문이라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아이다. 구와바라 혼인보를 상대로 초반에 밀리지 않고 두었다니. 중반쯤 가서 왠일인지 돌을 던졌기에 제대로 된 실력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이겼다 하니 충분히 관심이 갈 만하였다.

 

 “누구세요?”

 

 어린 아이라면 무서워할 법한 인상이라는 것을 고요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심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며 묻는 그 당당함이란. 바둑계에 있으면서 자신을 모르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말이다. 고요가 유심히 키요시를 살폈다.

 

 “네 실력을 보고 싶구나.”

 

 무뚝뚝한 자신의 표정이 무서워 마주치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곤 하는 여타 아이들과는 달리 키요시의 안색은 어느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얼마 전만 해도 어느 아이는 돌 하나 놓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며 뛰쳐나가질 않았던가. 아키라를 이겼다는 또 한 명의 아이 ‘신도우 히카루’를 떠올리니 더욱 더 비교가 되었다.

 

 “도우야 선생님, 잠시….”

 

 당장이라도 아이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런 고요를 막아서는 자가 있었다. 바둑계관계자는 조심스럽게 고요를 부르며 귓가에 소곤거렸다. 요는 행사 일정에 늦을 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혀를 차고 다시 돌아본 후지사키 키요시에게선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호승심인가? 이 나를 상대로? 고요는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아쉽게 되었구나.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요즘 어린애들 같지 않군. 오랜만의 패기어린 눈동자였기에 고요는 조금 기대감이 들었다.

 

 

 

 

 아키라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후지사키 키요시.”

 

 본원에 오면 만날 수 있으리라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의 모습에 아키라는 냉큼 달려가 아이를 붙잡았다.

 

 “저번 승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아.”

 

 키요시는 붙잡힌 손을 꽉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자뭇 살벌하였으나 아키라는 뒤지지 않고 따졌다.

 

 “왜 중간에 돌을 던진 거야? 누가 봐도 네가 이기고 있었는데!”

 

 답지 않게 큰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키라는 분을 삭히지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키요시를 응시하였다. 한숨과 같이 키요시의 입술이 열렸다.

 

 “차라리 오목을 두고 말지….”

 

 그렇게 말하곤 곧장 비뚜름하게 닫힌 입가에 아키라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굳었다. 키요시는 아키라의 손을 떨쳐내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키라는 멍하니 그 말을 되새기다가 날 서린 표정으로 키요시의 손목을 재차 낚아챘다.

 

 “다시 둬. 후지사키 키요시.”

 

 이번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아키라의 맞물린 이가 까득 갈렸다. 키요시를 붙든 채 아버지의 기원으로 달려온 아키라가 거칠게 돌을 섞었다.

 

 “자, 내가 흑돌이야. 이번엔 제대로 둬.”

 

 무언가 반박하려는 듯 입을 떼는 키요시에게 아키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엔. 이번엔 제대로 이겨줄 테니.”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억지로 추스르며 키요시의 눈을 빤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리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가 이를 갈았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정말 두기 싫다는 듯이 느릿하게 돌을 쥐는 키요시를 눈으로 끝까지 따라붙으며 아키라가 먼저 돌을 놓았다. 지루하기라도 하단 듯이 다음 수가 이어지고, 악에 받쳐 아키라는 다음 수를 두었다. 그리고 또 다음 수, 또 다음 수….

 

 역시 녀석의 실력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어질수록 처참한 실력 차에 이를 악 문 채 결국.

 

 “졌…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야마노 4단은 상대방의 입이 열리고 작게 속살거리는 것을 보았다.

 

 ‘졌지?’

 

 후지사키 키요시. 작은 거인에게 야마노 4단은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야마노 4단에게 들은 바 있는 후지사키 키요시 2단의 악명을 사무라는 다른 쪽으로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대국을 하면서 자? 잔다고?

 

 “장난하냐?”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프로기사가 된 만큼 직업의식정도는 있어야하는 거 아냐?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화를 내려는 사무라에게 키요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리곤 아무것도 아쉽지 않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그리고 대국실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잠에 취한 모양새였다. 내 대국이 그렇게나 지루했다고? 그렇게나 상대할 가치가 없었단 말인가? 울컥한 사무라가 닥치는대로 키요시를 쫓아나섰다.

 

 “바둑을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탕 소리가 나며 저도 모르게 어린애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친 사무라는 무심코 아차했다. 그러나 곧 다시 분노로 차올라야했다. 푹 숙여진 고개 아래, 키요시의 입가가 흔들리며 몸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웃음이라도 참는 것처럼.

 

 “이 자식!”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나타난 사내에 사무라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오가타 9단! 하지만!”

 

 변명처럼 말을 이으려던 사무라에게 오가타는 안경을 쓸어올리며 재차 그를 말렸다.

 

 “바둑에는 바둑으로 보여주어야지요.”

 

 이게 제대로 말린 것일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무라는 잠시 벙쪘다가. 꼬시다는 듯이 키요시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바둑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오가타 9단에게, 대국하다 조는 모습을 걸렸다? 말 다했지. 어디 한 번 혼쭐 나보라지! 그런 사무라를 오가타가 달래어 보내고선 고개를 돌렸다.

 

 “꼬마야… 아니, 후지사키 2단이라고 해야겠군.”

 

 오가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 실력을 좀 봐야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네 실력을 좀 봐야겠어.”

 

 빈 기원으로 향한 오가타가 키요시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키요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돌을 깔 필요는 없겠지.”

 

 아키라에게 ‘오목이나 두라’고 했을 정도니까. 낮은 목소리로 오가타는 키요시를 도발하였다. 과연 프로 9단을 상대로 이 아이는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

 

 “속기로 해주세요.”

 

 한숨과 함께 내뱉어진 아이의 말에 오가타는 실소를 머금었다. 역시나, 그냥 아이가 아니란 건가. 하긴 아키라를 이겼을 정도니 그럴만도 하지. 순식간에 진지해진 아이의 눈빛에 오가타 또한 표정을 굳혔다.

 

 “자, 먼저 둬라.”

 

 흑돌을 쥔 키요시에게 오가타가 턱짓했다. 키요시는 망설임없이 수를 두었다. 역시 그냥 운으로 아키라를 이긴 것은 아니라는 듯이 키요시의 실력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가타가 두면 둘수록 느꼈다. 한쪽으로 치우쳐있지도 않고, 귀측과 중앙 모두 착실히 공격해나간다.

 

 한참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 키요시의 손이 멈추었다.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적이곤 오가타를 바라보는 것이….

 

 “졌습….”

 

 “아니. 끝까지 두도록 해.”

 

 이럴 줄 알았지. 바둑을 뭘로 보고? 오가타가 희번뜩한 눈으로 키요시를 바라보자 키요시가 사례가 들린 것처럼 딸꾹질을 해댔다. 하긴, 그래도 어린애는 어린애지. 너무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본 것은 아닌가 싶어 머쓱해진 오가타가 속으로 헛기침을 하곤 덧붙였다.

 

 “겁먹은 척해도 소용 없다.”

 

 하지만 손속은 그대로였다. 따악 소리가 날 만치 강압적인 태도로 오가타가 다음 수를 이었다. 키요시가 크게 숨을 내쉬며 돌을 꽉 쥐었다. 그때부터였다. 달라진 것은.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기백이 달랐다. 조금 전 느슨하던 기색은 어딜 가고 오가타 못지 않은 실력으로 빡빡하게 상대를 몰아붙인다.

 

 오가타가 어느새 미간을 찡그리고 한참이나 바둑판을 응시한 사이 앞쪽에서 드르륵 소리와 함께 키요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가타의 눈썹이 비죽 치솟았다.

 

 “어딜 가?”

 

 “…너무 졸려서, 화장실을 좀….”

 

 대답을 듣고 나서 대충 손짓으로 키요시를 보낸 뒤 오가타는 한참이나 생각에 빠졌다. 키요시가 그대로 튀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이가 자리를 비우고 30분이 지난 후였다.

 

 

 

 

 일전에 멱살을 잡힌 소란이 있었던 이후, 조금은 얌전해지리라 생각했던 후지사키 키요시는 여전했다. 건방지다는 소문에 알맞게 바둑을 두는 태도에 지루함이 옅보였고 심지어는 상대가 패배를 시인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면 어서 패배를 선언하라며 눈을 부릅뜨기까지 했다.

 

 “졌습니다….”

 

 시무룩한 상대의 음성에 키요시의 표정이 풀렸다. 그것을 본 다른 이들이 혀를 차며 아이를 탓했다. 저런 아이가 어쩌다가 저런 실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신께서도 무심하시지.

 

 

 

 

 키요시를 아들로 둔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들이 잘 적응하고 있는지, 바둑계에서 또래 아이들을 만나기나 했을지, 할아버지의 부추김에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망설이던 그녀는 키요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키요시, 오늘은 네가 공부하는 거 구경해도 되겠니?”

 

 “네?”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속내를 숨기고 웃었다.

 

 “우리 키요시가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던 아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나타난 겐조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같은 내용이었으므로 키요시와 둘은 사이 좋게 키요시의 방으로 들어섰다.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듯 빠른 손놀림으로 바둑사이트에 접속한 키요시는 습관처럼 빠르게 대국을 매칭하였다.

 

 바둑을 두는 것을 보여달라는 것은 아니었는데, 본격적으로 보여주려는 태세에 어머니는 웃었다.

 

 “어머, 바둑 두는 걸 보여주려는 거니?”

 

 보여준다는 것에 긴장했는지 조금 굳은 아들의 모습에 어깨를 토닥였다. 옆에서 겐조가 어서 실력을 보여달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키요시는 나름 침착하게 상대와의 대국을 시작하였다.

 

 “‘sai’? ‘sad’? 어떤 게 키요시 네 이름이니?”

 

 비슷한 닉네임에 의아한 듯 묻자 부끄러운 듯 말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하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 둘은 키요시의 대국하는 모습에만 집중하였다.

 

 순식간에 대국에서 승리하고 조금은 뿌듯해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든 키요시에게 겐조가 ‘한 번 더 보여달라’며 졸라대서 키요시는 결국 한숨을 쉬며 다른 이와의 대국을 시작하였다.

 

 ‘toya koyo’

 

 잠시 고민하는 듯싶던 키요시가 두 번째 대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머리를 짚으며 표정을 굳히는 게, 어머니는 혹여나 자신들이 방해가 되어 그런 것은 아닐까하여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니?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인가보구나. 엄마가 방해가 된다면 나가줄까?”

 

 묻기가 무섭게 예상이 맞았다는 듯이 끄덕여지는 키요시의 고개에 어머니는 알겠다며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쉬워하는 겐조를 말리며 함께 데리고 나가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요시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입에서 한숨이 푹푹 나오는 것과 잘게 떨리는 것을 어머니는 바깥에서 몰래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진 모양이니, 오늘 일은 먼저 꺼내지 말아야겠다. 미안한 마음에 쓰게 웃었다.

 

 

 

 

 아키라는 어제 있었던 대국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넷바둑을 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 곁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는데, ‘sad’라는 상대편이 갑자기 돌을 던진 것이다. 분명히 이기고 있던 대국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을 읽었는지 대국 포기를 선언했다? 어째서였을까. 아키라는 그래서 ‘sad’로 추정되는 이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아버지와 어제 대국했다면서.”

 

 본원에 가자마자 후지사키 키요시를 찾았다. 그리고는 일단 떠보기로 하였다. 확실하지는 않았으므로. 어찌 알았냐는 듯이 커지는 키요시의 두 눈동자에 아키라는 확신하였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맞나보네. 후지사키, 네가 ‘sad’지?”

 

 저도 모르게 날타롭게 말이 나갔으나 아키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키요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다못해 일그러졌다. 아주 명확한 증거였다. 아키라가 이제는 확신에 차서 물었다.

 

 “아버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셔. 대체 왜 네가 거기서 돌을 던진 건지. 말해줘. 어디까지, 뭘 봤기에 거기서 돌을 던졌…….”

 

 다그치듯 묻는 아키라에 키요시가 일그러진 얼굴로 신경질스럽게 소리쳤다.

 

 “다 죽게 생겼는데 그럼 어떡하냐!”

 

 이제 보니 울고 있었다. 울어? 왜? 아키라가 벙쪄서 굳어 있는 사이 키요시는 저 멀리 아키라를 뿌리치고 달려간 뒤였다. 아키라의 머릿속에는 한참이나 의문이 남았다.

 

 대체, 왜? 왜 저 아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돌이 모조리 죽게 생겼다고 우는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아키라가 못 본 키요시 본인의 패배를 보았나?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왜…?

 

 이상한 아이. 아키라는 다시 한 번 키요시에 대해 그렇게 정의했다.

 

 

 

 

 “아~ 오늘은 실컷 뒀다. 그치? 사이?”

 

 배시시 웃으며 히카루가 제 친구 ‘사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히카루는 보았다.

 

 ‘사이’

 

 창밖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아이의 입술이 분명히 그렇게 속삭였다. 그 눈동자는 정확히, ‘후지와라노 사이’에게 향해 있었다. 히카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히카루는 황급히 창을 끄고 뒤돌아보았다. 아이가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음에 재빨리 넷카페에서 벗어나 아이를 쫓아갔다.

 

 “저기! 저기, 헉헉….”

 

 뜀박질하느라 가쁜 숨을 고르고 히카루는 다급히 붙잡은 아이의 손을 재차 고쳐쥔 채 물었다.

 

 “저기, 혹시 봤어?”

 

 뚱한 얼굴로 저를 보는 아이의 모습이 익숙하다. 아, 그 싸가지 없다고 유명하던, 프로기사 아닌가? 이름이… 후지사키 키요시였던가. 히카루의 안색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래, 다 봤어. 봤으니까 저리 가. 시끄러워.”

 

 명백히 짜증을 내는 모습에 히카루가 초조한 마음으로 키요시를 뒤따랐다. 일부러 히카루를 골리기라도 하듯이 키요시는 괜히 이곳저곳을 들렀다가, 게임방을 갔다가, 재미도 없어보이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히카루의 시선을 분산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쫓아오는 히카루가 귀찮았는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할까봐 그러냐? 그게 협박할 거리라도…….”

 

 협박?! 히카루가 경기를 일으켰다. 그리곤 아이가 원할 조건을 내걸며 빌었다.

 

 “둬달라는대로 둬줄 테니까 협박만은 하지 말아줘!”

 

 그런 히카루의 손을 탁 쳐내며 키요시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싫어.”

 

 단호한 그 음성에 히카루는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이대로 들키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히카루는 과감하게 무섭게 생긴 아이의 팔뚝을 잡고 멋대로 근처 기원으로 이끌었다.

 

 “가자! 대국해줄게!”

 

 “아니, 잠깐…!”

 

 뒤에서 키요시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히카루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따. 자신의 조급함이 먼저였기 때문에.

 

 후다닥 기원에 들어와 키요시와 자신의 대금을 선뜻 지불하고 가장 구석진 곳으로 착석했다. 여기라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겠지.

 

 “둬줄게. 대신, 비밀이야. 도우야나 오가타 선생님이나… 여튼,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사이’라고 절대 말하지 마. 알겠지?”

 

 히카루는 자신이 바라는 말을 후다닥 내뱉고는 키요시가 내빼지 못하게 돌을 쥐여주고 자신 또한 돌을 쥐었다. 그간 사이와 함께해 온 습관 상, 사이가 당연히 지도기를 두어주어야한다는 생각에 흰돌을 자신이, 까만 돌을 키요시에게 건냈다.

 

 “잘 부탁합니다.”

 

 히카루가 넙죽 인사를 하자 마지못해 키요시가 돌을 두었다. 대국의 시작이었다.

 

 한 수 한 수 빠르게 주고받던 대국이 어느새 길어지고, 본격적으로 흑돌과 백돌의 싸움이 이어지려는 그때.

 

 “그만하자.”

 

 키요시가 돌연 두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곤 자신이 두었던 돌을 쓸어모아 정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든 지든 나는 말 안 해.”

 

 갑작스레 흐름이 끊겨 벙찐 히카루를 내려다보며 키요시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뒷말은 무엇이었을까? 부끄럽다는 듯이 꾹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하는 키요시를 히카루가 멍하니 바라보다 이 익숙한 기풍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sad’…?”

 

 ‘히카루!’

 

 정신을 차린 것은 귀신의, 사이의 외침 덕분이었다. 아차싶어 키요시가 있을 곳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아이는 사라진 뒤였다.

 

 

 

 

 아키라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지사키 키요시에 대해. 그래서 돌연 물었다.

 

 “후지사키. 너는 왜 바둑을 두기 시작했어?”

 

 시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의 수를 모조리 죽게 놔두길 망설이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두 불계승이었지, 그때 자신의 아버지 도우야 고요와의 대국 때처럼 상대의 돌이 모조리 죽기 직전까지 사태를 몰아간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나? 지금까지의 행동들은 모두 불계승으로 끝내려고? 아니, 분명 왜곡된 소문들도 있겠지….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아키라의 시야에 머뭇거리는 키요시가 잡혔다. 정곡을 찔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할아버지가 바라셨어.”

 

 할아버지가? 의아함에 되물으려던 아키라는 이내 굳어지는 키요시의 표정에 곧장 되묻지는 못하고 기다렸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답이 없자 아키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것뿐이야?”

 

 그게 잘못이었을까? 키요시는 미간을 찡그리고 아키라를 노려보았다. 서늘한 음성이 아키라의 귓가에 꽂혔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명백히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려는 키요시를 아키라가 재빨리 따라잡았다.

 

 “후지사키! 너는 바둑을 왜, 그렇게 두는 거니?”

 

 그리곤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물음을 내뱉었다. 대답을 바라진 않았다. 어쩌면 무시하고 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고싶지 않다면 두지 않으면 될 텐데, 상대방의 수를 모조리 삼키는 것이 두렵다면 다른 방법을 취하면 될 텐데. 물론 나름의 방법으로 불계승을 택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방법이…. 아니, 무엇보다 바둑 두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바둑이 좋아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자신이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중얼거리는 사이에 그러한 아키라의 귓가에 키요시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아니야.”

 

 단호한 그 음성에 아키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라고? 마주한 키요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노력해봤다고.”

 

 무엇을 노력했다는 것일까? 아까 ‘왜 그렇게 두는 거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일까? 그렇게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해봤다는 것일까?

 

 “답이 없었어. 모르겠어, 어떡해야할지….”

 

 이를 악물며 키요시가 말을 이었다. 역시. 어떻게 두어야할지 모르는 거였나. 어떻게 두어야 상대와 ‘함께’ 둘 수 있을지 모르는 거였던 모양이다. 일방적으로 자신만 두는 것이 아닌 상대와 두는 것. 그렇기에….

 

 “난 무서워.”

 

 후지사키 키요시, 이 아이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죽인 채 자신만의 수를 두는 것을. 그리고 상대방이 좌절해버리는 것을.

 

 ‘져줄까?’

 

 아키라 본인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또래 아이들과의 대국에서 늘 이길 때면 상대 아이의 표정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그렇게 견디기 힘들 때가. 있었다.

 

 그것을 이 아이도, 아니 어쩌면 저보다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아키라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까? 일단… 두는 것부터 어떻게 해보자.”

 

 아키라의 말에 두 눈이 동그래진 키요시가 순간적으로 순해보인다고 생각했다. 키요시의 고개가 어렵사리 두어 번 끄덕여졌다. 어딘가 간절한 표정이었다면 착각일까.

 

 “고마워, 도우야.”

 

 착각이 아닐지도. 아키라는 설핏 웃으며 키요시의 손을 이끌었다.

 

 “어… 음….”

 

 이내 이어진 대국에서 아키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음… 저기, 후지사키. 잘 안 된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

 

 어떻게 말해야할까. 몇 판을 두어보아도 아키라 자신의 수가 처참히 무찔러지는 것을 보고 키요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그에 따라 아키라도 자신의 패배에 의연해보이려 노력했다. 안 그랬다가는 키요시는 또다시 절망하고 말 테니까. 애써 밝은 목소리로 아키라가 말했지만 키요시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나 갈래.”

 

 “…으응.”

 

 벌떡 일어나서 짓씹듯이 내뱉는 키요시의 말에 아키라는 차마 이번만큼은 키요시를 붙잡지 못하였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편하다~!”

 

 히카루가 해방감을 느끼며 소리쳤다.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사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어서 무척이나 난감했었는데 사이를 볼 수 있는 또다른 친구가 있다니 히카루는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계속 보이는 건 아니라 가끔씩 보이는지 사이가 있을 허공을 몇 번 보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저번에 보니까 되게 잘 두더라. 사이를 이길 줄은 나도 몰랐어. 근데 후지사키, 너는 ‘sad’ 맞지?”

 

 자꾸 말을 거는 게 귀찮았는지 쥐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사이는 히카루를 말리려다 자신도 궁금했기에 유심히 키요시의 말을 기다렸다.

 

 “시끄럽고 두기나 해.”

 

 역시 말렸어야했을까.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는 키요시에 사이는 조심조심 눈치를 살펴가며 히카루에게 다음 수를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두었을까, 백돌이 흑돌을 공격한 그 순간 키요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잠깐 화장실.”

 

 흔쾌히 다녀오라고 보내주었으나 히카루는 참을성이 좋지 않았다. 10분이 지나도록 키요시가 안 돌아오자 히카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저 멀리 키요시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게 보인 것은.

 

 “후지사키! 멈춰봐! 그렇게 두다가 말고 가버리면 어떡해!”

 

 왜 이렇게 자꾸 도망을 가는 거야? 히카루가 씩씩대며 키요시를 뒤쫓았다.

 

 

 

 

 오가타는 ‘우연히’ 키요시를 발견하여 아이와 다시 마주앉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대국을 하자고 하면 도망을 치겠지. 가늘게 뜬 눈으로 키요시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도우야 명인께서 은퇴하셨다.”

 

 이 말을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늠해보던 오가타가, 이내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말을 이었다.

 

 “‘sai’와 인터넷 바둑을 두고 난 뒤였지. 그리고 그게 ‘sai’와의 대국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전에 두었던….”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 반응을 기대하며 가장 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내들었다.

 

 “그래, ‘sad’와의 대국도 영향이 깊겠지. 안 그런가?”

 

 ‘sad’를 호명하자 아이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모른 척 헛기침을 해댔지만 이 정도로 티가 난다면 모를 수가 없다.

 

 “후지사키 키요시. 역시 네 녀석이 ‘sad’가 맞았군.”

 

 오가타가 결국 자신의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sad’이며, 도우야 고요를 이긴 인터넷 바둑의 강자이다. 결론은 내려졌다.

 

 

 

 

 잔뜩 심통이 난 채 집에 들어선 키요시에게 겐조가 물었다. 대국에서 지기라도 했던가? 그런 소식은 못 들었는데? 아니면 무슨 다른 일이 있었던 걸까? 그치만 이걸 보여주면 기분이 풀어지겠지? 겐조는 자신이 지금껏 모아온 스크랩북을 키요시에게 보여주며 손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밝은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이것 보거라, 키요시! 저번에 네가 신초단에서 둔 대국과 이번에 네 이름이 나오는 기사는 다 모아두었단다!”

 

 정답이었을까? 아이가 그것을 보더니 부끄러운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홱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귓가가 빨간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겐조는 허허 웃으며 우리 귀여운 손주를 또 어딜 가서 자랑해야할까 상상의 나래에 빠졌다.

 

 

 

 

 “그만 둘까….”

 

 지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키요시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키라는 냅다 소리쳤다.

 

 “무슨 말이야? 내가 도와줄게. 포기하지 마!”

 

 키요시는 놀란 듯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키라를 보았다. 삽시간에 굳어지는 표정에 아키라가 키요시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애 아이의 어깨를 붙들고 웃어보였다.

 

 “오늘 대국 일정 끝났지? 아버지 연구회에 가서 같이 공부하자.”

 

 그래, 아버지랑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라면 키요시의 고민을 해결해줄 방안이 분명 나올 것이다. 아키라는 키요시의 손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자, 가자. 얼른 가지 않으면 늦을 거야. 2시부터 시작이니까.”

 

 “잠깐, 나는….”

 

 “아, 갑자기 참가하는 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도 너를 반겨주실 거야.”

 

 “화장실 좀…!”

 

 “그러면 늦을거야. 우리 집에 가서 가면 되지.”

 

 키요시의 말을 묵살하고 아키라가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아키라가 한 아이를 데려왔다. 아키라 또래의 사나운 인상의….

 

 “네가 여긴 웬일이냐, 후지사키 키요시.”

 

 후지사키 키요시. 떠오르는 신성. 사람들의 이목이 아키라 옆의 그 아이에게 집중되었다. 고요나 오가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가타의 까칠한 음성에 뒤이어 고요의 음성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어서오거라. 아키라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은은한 기대감이 서린 음성이었다. 무섭기로 소문 난 두 사람의 앞에, 그리고 또 많은 어른들 사이에 껴있으면서도 키요시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였다. 다만 묵묵히 시선을 굴리는 게….

 

 “또 튈 생각은 하지 마라.”

 

 왜인지 모르겠으나 자꾸만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보여서 오가타는 아이가 달아날 새라 먼저 선수를 쳤다. 미간을 찌푸리며 오가타와 아키라를 훑는 것이 아무래도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튀다니… 후지사키, 너 전에 오가타 선생님한테서 도망친 적 있니?”

 

 아키라가 놀라서 물었으나 키요시는 대답할 생각이 없었는지 눈을 돌렸다. 오호라. 피할 수 없다면 바로 부딪히겠다는 건가. 곧장 바둑판을 바라보는 키요시의 행동에 오가타가 피식 웃었다.

 

 “오자마자 대국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렇다면 나야 좋다마는.”

 

 키요시가 한숨과 함께 오가타를 바라보았다. 오가타는 바둑판을 끌어오며 도우야 고요에게 양해를 구했다.

 

 “괜찮으시죠? 선생님.”

 

 “그렇게 두고 싶다면야 바로 두어도 상관은 없겠지. 아키라, 키요시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주겠느냐.”

 

 “네, 아버지.”

 

 순식간에 판은 벌어졌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오가타와 키요시가 마주앉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키요시의 고개가 숙여졌다. 오가타는 그렇게 피하더니 두고 싶기는 했던 모양이라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끝이 난 대국은, 오가타의 패배였다. 완전한 패배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오가타가 시험삼아 이것저것 두었기에 그답지 않은 스타일로 두게 되어 중간부터 휘말려버린 경향이 있었으니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지르문 키요시에게 아키라가 무어라고 속삭였다.

 

 “너무 낙심하지 마. 금방은 아니지만… 차차 괜찮아질 거야. 네가 사실 바둑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어.”

 

 키요시는 더욱 잘게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토론에 빠져 있었다.

 

 “좋은 수지만 공격에 너무 치중해…….”

 

 도란도란 서로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그들은 이내 아키라의 말에 잠시 주목하였다.

 

 “후지사키의 수는 하나같이 공격적이에요. 마치 타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요.”

 

 “배운 적….”

 

 반발하려는 키요시의 말을 자르고 오가타가 말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일부러 배우지 않은 걸 수도 있지.”

 

 “일부러가 아니라….”

 

 키요시는 다시 반발하였다. 그 말을 자르고 아키라가 되물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고요?”

 

 키요시의 입가에서 한숨이 흘러나오고 그 입이 비뚜름하게 닫혔다. 그것을 지켜보던 오가타가 말을 이었다.

 

 “아예 배우지 않았다는 게 아니야. 그랬다면 엉망이었을 거야.”

 

 그제야 반발심을 억누르고 조용해진 키요시를 슬쩍 곁눈질하고 덧붙여 말했다.

 

 “배운 적이 없는데 이렇게까지 둔다? 말이 안 되지. 일부러 타협하는 법을 제외하고 배웠다는 말밖에는 안 돼. 안 그래도 저번에 확인했던 참이다…. 단순히 운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는데, 기복이 없는 것을 보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구나.”

 

 ‘운’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움찔하는 키요시의 모습을 오가타는 보았다.

 

 “무심결에 상대의 허점을 파악하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걸 수도 있다.”

 

 그게 오가타가 내린 결론, ‘후지사키 키요시’의 실체였다. 오가타는 마지막으로 확인하듯이 키요시에게 물었다.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지? 후지사키.”

 

 멋대로 이야기한 것에 화가 났던가.

 

 “모릅니다.”

 

 키요시는 완전히 입을 닫은 채 비뚤어진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날, 키요시가 가족 모두가 있는 식사자리에서 ‘그만 두고 싶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게 갑자기 무슨 이야긴가 싶었는데, 겐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 하였다.

 

 “계속 이기니 재미가 없는 거로구나.”

 

 그럴 만도 하다. 듣기로는 거의 연승만 하고 있다고 하더니, 성취감이 덜한 모양이었다.

 

 “낙심하지 마렴. 키요시. 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할애비도 알고 세상 사람들도 모두 안단다. 예선도 거의 통과하였으니 조금만 있으면 타이틀도 딸 수 있겠지!”

 

 타이틀, 그렇다면 최정상 프로기사들과 대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키요시도 지금보다 더 큰 성취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겠지. 겐조가 고개를 주억였다.

 

 “싫어요.”

 

 불퉁하게 키요시가 대꾸하였다. 겐조는 허허롭게 웃으며 키요시를 토닥였다.

 

 “지금 당장 그러고 싶은 것도 이해한단다. 성격도 급하지. 차분히 기다리거라.”

 

 그리 말하니 삐쳤는지 입이 조금 더 튀어나온 느낌이었지만 키요시는 할아버지의 말에 거역하지 않고 한숨만 쉬었을 뿐이다.

 

 

 

 

 자신의 수가 한참동안 이어지질 않자 한숨을 내쉬는 후지사키 키요시의 모습에 조급해진 사내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최종 예선까지 올라선 키요시의 대국은 나날이 늘어갔고, 덕분에 오늘은 연달아 한 번 더, 총 두 번의 대국을 두어야만 했다. 해서 정신이 없을 와중에 키요시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

 

 “후지사키, 사이… 사이 못 봤어? 사이가 사라졌어.”

 

 신도우 히카루였다. 히카루는 간절한 표정으로 갑자기 사라진 자신의 친구를 보지 못했느냐며, 유일하게 제 친구를 함께 볼 수 있는 아이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일단 대국이 있어서.”

 

 그러나 반응은 냉담하였다. 제 손을 떼어내는 키요시의 반응에 히카루는 절망하였다. 키요시의 눈은 더 이상 ‘사이’를 향하지 않았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자신에게 할당된 두 번째 대국을 마저 이어갔다. 막힘없이 승부를 치르고 당연하다는 듯이 승리를 거머쥔 아이는 어쩐지 생각이 많아보였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바둑판을 바라보던 아이는 복기를 대충 마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국실을 나서고 바깥에서 아직까지도 멍하니 앉아있는 히카루를 보고 키요시가 다가갔다.

 

 “사이가 사라졌다고 했지.”

 

 많은 생각을 마친 것 같은 키요시는 히카루의 가슴께를 손으로 톡 가볍게 두드렸다.

 

 “사이는 여기 있잖아.”

 

 히카루는 버럭 화를 내려다 멈추었다. 뭐라고? 멍하니 되물은 히카루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키요시는 걸음을 옮겼다. 히카루는 그대로 집으로 향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젠가 너한테만큼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아키라는 설렜다. ‘sai’에 대해 쫓고 있던 상대에게서 들은 대답이 ‘언젠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니. 그럼 지금 말해줘도 되는 것 아닌가? 아키라는 히카루를 다그쳤지만 히카루는 금방이라도 열 것 같았던 입을 되레 꾹 다물어버렸다.

 

 “말해준다며, 신도우!”

 

 “언젠가라고 했잖아! 후지사키한테 물어보시던지! 후지사키는 알고 있으니까!”

 

 “후지사키?”

 

 히카루는 아차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키라는 틈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전혀 말해줄 것 같지 않던 히카루를 놓아주고서 아키라는 냉큼 내달렸다.

 

 “후지사키!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며, ‘sai’에 대해! 신도우가 뭐라고 했지?”

 

 그리곤 다짜고짜 물었다. 키요시가 당황하든말든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대답해, 후지사키!”

 

 아키라가 키요시에게서, 그리고 본인 스스로에게서 답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횡설수설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분명 신도우는 ‘sai’라고 생각했는데……. 후지사키 너는 이미 알고 있다고 했어. 그래, 너는 ‘sad’로 ‘sai’와 대국한 적이 있었지? 말해. 신도우가 ‘sai’인 거야?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어떡하지? 자신의 생각이 모두 틀렸다면? 아키라는 혼란스런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그런 아키라에게 키요시가 짜증스레 대꾸하였다. 저를 붙든 아키라의 손을 탁 쳐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귀신이라도 들렸나보지.”

 

 

 

 

 “고마워, 후지사키.”

 

 히카루는 여러모로 고마운 마음에 후지사키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게 되었다. 역시, 첫인상은 별로고 평소에도 좀 툴툴대지만 좋은 녀석이 틀림없다. 마주한 키요시에게 히카루가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곤 부쩍 친근해진 키요시에게 히카루가 제안했다.

 

 “참, 이따가 도우야랑 같이 바둑공부 하기로 했는데, 같이 할래?”

 

 즉각 찌푸려지는 키요시의 미간에 히카루는 키득키득 웃었다. 싫지 않으면서 또 저런다.

 

 

 

 

 아키라의 아버지 도우야 고요에게는 기원이 하나 있는데, 조용하기만 하던 그 기원은 근래들어 제법 시끌벅적해졌다.

 

 “‘아하’라고? 몇 번째야? 같은 실수를 또 하면 어떡해!”

 

 “그러는 도우야 너야말로 내가 둔 수에 세 번이나 감탄했잖아!”

 

 버럭버럭 소리치며 투닥이는 두 명의 아이 도우야 아키라와 신도우 히카루 사이에서 후지사키 키요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지사키, 어떻게 생각해?”

 

 투닥이던 두 사람의 불똥은 가만히 있던 키요시에게까지 튀었다. 그러고도 끝나지 않는 다툼에 키요시는 결국 벌떡 일어나며 거칠게 돌 몇 개를 내려놓고 기원을 나가버렸다. 손속은 거칠었지만 바둑알을 아끼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잠시 벙찐 둘은 이내 돌의 형국을 보고 새롭게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 두는 방법도 있었구나.”

 

 그러나 키요시가 자리를 떠나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하고는 허겁지겁 자신들의 친구를 불러세웠다.

 

 “앗, 잠깐 후지사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말이다.

 

 

 

 

 오가타는 오늘만을 기다렸다.

 

 “여기까지 올라올 줄 알았다.”

 

 초단부터 시작해서 이제야 마주하게 됐지만…. 저번 대국 같지 않은 대국만으로도 오가타의 호승심을 부추기기에는 충분했다. 오가타 본인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오가타는 그나마 제대로 둘 뻔했던, 그러니까 화장실을 간다며 튀어버렸던 일련의 대국을 떠올리며 비소를 지었다.

 

 “오늘은 도망치지 못하겠지. 정식 리그전이니까.”

 

 도망치고 싶다면 어디 한 번 도망쳐보란 뉘앙스였다. 그러한 도발에도 키요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둑판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잔말 말고 어서 시작이나 하란 듯한 그 행동에 오가타가 코웃음을 쳤다.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가타 선생님.”

 

 그런 행동이 어디까지 갈지 두고봐야겠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국에 임하게 된 오가타는 잠시 뒤 할 말을 잃었다.

 

 방심했다. 지금껏 이 아이가 치른 기보를 보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오래 끌은 적이 거의 없었어서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완전한 방심? 그것도 아니면….

 

 실력에서 밀린 것인가. 인정하기 싫었으나 오가타는 방심 또한 실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졌습니다.”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였다.

 

 “대단한 대국이었어.”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음은 없을 것이다. 한참을 생각을 정리하며 있던 오가타는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한 쌍의 검은 눈동자는 종 잡을 수 없는 색을 띠고 있었다. 후지사키 키요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무언가 허탈해 보였다. 분명 이겼음에도 기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런 표정을 어디서 보았더라. 문득 기시감이 들었으나 오가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게 무슨.”

 

 ‘북두배’ 즉, 한중일 주니어 단체 바둑 대전에 참가해달라는 바둑관계자의 말에 키요시가 미간을 찡그렸다. 마치 ‘주니어’라 관심따윈 없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걸 들이미냐는 듯한 모양새라 관계자는 키요시의 말을 자르고 대꾸했다.

 

 걱정하지 않아고 되고, 예선은 면제이며, 신경쓸 것은 하나도 없으니 너는 그냥 바둑만 두면 된다고. 그럼에도 그게 싫었던가, 펴지지 않는 얼굴에 관계자가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런 버릇하고는. 어른 앞에서.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관계자가 서둘러 괜한 말들을 덧붙였다.

 

 “하하, 기대가 많이 되나보군요. 그렇게 힘주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과 중국이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한테는 후지사키 3단도, 도우야 3단도, 그리고 신도우 초단도 있으니까요.”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후지사키 키요시의 실력은 진짜였으니까. 짜증이 났는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키요시에 아직 억지로 전해야할 행사가 많았던 관계자는 서둘러 아이를 불러세웠으나 키요시는 이미 쏠랑 사라진 뒤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틀어박힌 키요시를 조심스레 불러다가 겐조는 북두배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리 통역이 잘못되었다고는 해도, 한국이 은근히 일본 바둑을 무시했다고! 가서 이겨주고 오너라, 키요시!”

 

 저보다도 더 들뜬 할아버지를 키요시가 한숨을 삼키며 외면하였다.

 

 북두배 대회 첫날, 일본은 순조롭게 승리하였고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당연히 전승하리라 생각했던 후지사키 키요시가 돌연 고개를 숙였다. 한국과의 대국에서였다.

 

 “졌습니다.”

 

 주장도, 이장도 아닌 삼장에게. 사람들은 갑자기 주장이던 키요시를 삼장으로, 삼장이던 히카루를 주장으로 바꾼 것도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제대로 시합이 매듭지어지기도 전에 키요시가 한국의 삼장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어찌된 영문인지 웅성웅성하는 사이 아키라는 자신의 대국을 승리로 매듭지고 나서야 키요시가 패배를 외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째서?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곧 히카루를 보는 키요시의 눈빛에서 그 의중을 읽어내었다.

 

 ‘난 두지 않을 거야.’

 

 어젯밤 이야기했던 말이 사실이었다는 듯이 키요시는 행동하였고 그 의도는 분명하였다.

 

 신도우 히카루에게 필사의 무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 간절함이 정점에 달아, 그 혼신의 힘으로 제 실력을 보여주기를 바라니까.

 

 아키라가 그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이어질 히카루의 대국을 주시하였다.

 

 얼마 뒤, 승패가 갈렸다.

 

 반집 패.

 

 어찌 보면 아쉬운 결과겠지만 히카루의 바둑을 지켜본 이들이라면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한 진심어린 결과였노라고.

 

 “신도우가 졌어….”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키요시에게 아키라가 전했다. 키요시 또한 똑똑히 보았을 테지만 그 의중을 들어보고자 함이었다. 실망했을까? 아니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별 것 아니었다.

 

 “간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 아니 어쩌면 조금 더 후련해보이는 표정으로 키요시는 대국장을 나섰다. 그 모습에서 아키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묘한 배려를 느꼈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속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아이였지만, 동시에 상냥한 아이이기도 하다. 아키라는 그제야 확실히 키요시에 대해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혼인보 타이틀전 당일, 아침이 밝았다.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제 막 저단에 들어선 후지사키 키요시가 혼인보 타이틀 도전자가 되다니. 사람들은 이번 대국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것은 혼인보 당사자 또한 마찬가지. 구와바라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키요시에게 경고했다.

 

 “그때처럼 대충 두고 고개숙일 생각일랑은 말거라.”

 

 키요시가 꾹 입을 다문 채 인상을 썼다. 힐끔 구와바라를 흘기며 어렸던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소년이 된 키요시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당연한 이야기는 하지 말란 듯이 표정을 굳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대국이 시작되고, 구와바라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졌다. 본래 대국은 7국까지 있으나 어느 한쪽이 먼저 4승을 하여 끝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구와바라는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저번에 보인 실력이 우연이 아니라면 후지사키 키요시는 더 성장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욱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16살이 되는 해, 후지사키 키요시는 최연소로 ‘혼인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례적인 전승이었다.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키요시의 친구들인 아키라와 히카루가 모였다. 둘은 키요시의 경사를 축하하였으나 키요시는 섣불리 기뻐하지 않았다.

 

 “…더.”

 

 더 많은 타이틀을 따고 싶다는 듯이 눈을 바둑판을 바라보며 불태울 뿐이었다.

 

 “그래, 우리 정진해서 더 많은 타이틀을 따내자.”

 

 아키라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며칠에 걸친 긴 대국을 막 끝마친만큼 지쳤을 테니 오늘 대국은 이쯤에서 하자며 키요시를 다독였다. 저또한 지지 않을 저라며 흥분하는 히카루도 아키라가 간신히 달래고서 저녁이라도 함께 먹자며 둘을 이끌었다.

 

 “왜 그래?”

 

 돌연 길을 가다 말고 서점 앞에 멈춰 선 키요시에 아키라가 물었다. 빤하게 키요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니 ‘최신 묘수풀이 해설집’이라고 적힌 책이 서점 밖에 걸쳐져 있었다. 아키라는 설핏 웃으며 키요시에게 말했다.

 

 “후지사키. 오늘은 좀 쉬는 게 좋아. 무리하지 말자. 그래야 내일도, 그 다음날도 실컷 두지. 응?”

 

 그 말에 멈칫하며 걸음을 옮기기는 하였으나 키요시의 시선은 끝까지 미련이 남은 듯 책에서 떨어지지 못하였다.

 

 

 

 

 아키라를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비슷한 히카루와 키요시가 나란히 걷고 있는데, 히카루가 무언가 발견하고 멈춰섰다.

 

 “여기, 기억 나지?”

 

 키요시와 히카루가 처음 만난 곳. 인터넷 카페였다. 히카루가 잠시 회상에 잠겼다. 여기서 사이를 키요시에게 들켰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sad’로 나랑 대국할래?”

 

 약간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피곤한 키요시를 붙들고 대국을 하자고 하다니, 히카루는 조금 찔렸지만 아까 키요시도 분명 좀 더 대국하고 싶은 눈치였으므로 괜찮겠지. 사이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sai’의 아이디로 ‘sad’와 대국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그것은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러면 여전히 싱숭생숭한 이 마음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함께 둬줄거지?”

 

 재차 묻자 아키라의 말이 떠올랐는지 머뭇거리던 키요시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작게 열었다.

 

 “막 둘 거야.”

 

 히카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시작된 인터넷 대국은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쉽게 끝이 났다. 당연하다는 듯이 ‘sad’, 키요시의 승리였다. 히카루가 쓰게 웃으며 키요시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 고마워하지 마.”

 

 난색을 표하며 키요시가 고개를 저었다. 쑥쓰러운 모양이었다. 저를 잠시 힐끔거리다 홱하니 시선을 돌리는 키요시의 눈이 컴퓨터를 향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 모습에 히카루는 깨달았다. 아. 사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구나.

 

 후지사키 키요시도 사이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어쩌면, 그리워하고 있을 거고 그러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묘한 감정을 그 또한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그것은 ‘이제 후련하냐’고 묻는 키요시로 인해 확실해졌다. 히카루는 키요시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해버렸다. 키요시가 머쓱하게 고개를 들렸다.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며 히카루가 배시시 웃었다.

 

 “가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래?”

 

 “…아이스크림?”

 

 먹을 것에 솔깃하여 키요시는 다시 히카루를 보았다. 조금 피로가 가신 그 안색에 히카루는 저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이번에 타이틀전 기념 행사로 지도기를 둬주는 행사가 도쿄에 있는 호텔에서 열리는데, 우리 후지사키 혼인보도 참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둑관계자의 말에 키요시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제 제법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또렷해진 소년의 표정은 날로 날카로워져갔기에 관계자는 잠시 찔끔하였으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키요시에게 어거지로 서류를 쥐어주고 명인전도 기대가 크다며 꼬옥 두 손을 감싸쥐자 키요시의 시선이 한켠에 달린 달력으로 향한다. 다른 행사는 없는지 확인하는 모양새라 반기듯이 관계자가 말을 꺼냈다.

 

 “아, 다른 행사도 관심이 있으신 거군요!”

 

 그러기가 무섭게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대국일정이….”

 

 어찌 보면 아쉬워도 보이는 모양새였으나 그게 조금… 재수가 없어 보이는 건 왜일까. 관계자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모든 리그에서 승리했으니 바쁠만도 하다.

 

 “저는 그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걸음을 떼는 키요시를, 관계자는 이번 만큼은 붙잡지 않았다. 아무리 행사를 쥐여주고 싶다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바쁠 것이므로.

 

 

 

 

 오늘따라 심히 우울해보이는 키요시의 모습에 히카루와 신도우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내일 모레 행사가 있어….”

 

 아. 무슨 행사인지 바로 알아챈 아키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지도기는 안 되잖아.”

 

 아키라는 당황했다.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키요시에 바로 그 이유를 깨닫고,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어떡하지. 음….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아키라가 마주한 키요시의 간절한 눈빛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흠칫하며 두 눈을 크게 뜨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가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깨지고야 말았다.

 

 “어… 그러니까….”

 

 톡, 톡. 너무나도 정직하게 그려지는 후지사키의 돌들에 히카루도 아키라도 할 말을 잃었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사각형으로 두어진 돌들을 보고 뿌듯해하는 키요시에게 아키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티나게 지면 안 돼…….”

 

 키요시가 다시 침울해졌다.

 

 “…차라리 오목을 둘게.”

 

 히카루와 아키라는 더 이상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호텔에서 열린 지도기 행사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물론 고단자인 유명 프로기사들이겠지만 그 외에도 한 명 더 있다면 단연 후지사키 키요시를 꼽을 수 있다.

 

 “오오, 아직 16살밖에 되지 않았다지요?”

 

 그렇다. 16살에 혼인보 타이틀을 거머쥔 새로운 신성, 그에 관심이 가지 않을 바둑인이 어디 있겠는가? 시끌시끌한 사람들 틈새에 끼여 인상을 쓰고 있는 키요시의 모습을 멀리서 발견한 아키라가 이럴 줄 알았다며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후지사키를 좀 데려갈게요.”

 

 할 이야기란 건 별 거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키요시를 구출해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오자마자 숨을 돌리고 아키라는 키요시에게 속삭였다.

 

 “왜 사람들을 거절하지 못하고 있었어? 피곤해 보인다. 어제 말했지? 최대한 어린 친구들을 도와주는 거야.”

 

 키요시의 표정이 풀리고 고개가 끄덕여지자 아키라는 안도하며 슬쩍 웃었다.

 

 “너한테 갈 것 같으면 웬만하면 신도우랑 내가 커버하기로 했으니까.”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아키라가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또 어떤 일에 휘말릴지 모르기에 어서 자리를 잡는 것이 좋았다.

 

 “아, 저기 저 애를 도와주면 되겠다.”

 

 키요시를 떠밀 듯이 아이에게 보내고 아키라는 능숙하게 어른들을 상대했다. 그러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그랬는데 형 엄청엄청 바둑 잘 둔다면서요?”

 

 “바둑 말고 오목이라도….”

 

 “오목은 시시해!”

 

 “아.”

 

 아, 단말마에 키요시의 표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드물게 시무룩해하고 있을 표정 말이다.

 

 

 

 

 진짜로…. 아키라가 난감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바둑을 두면 어떡해….”

 

 후지사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아키라가 탄식했다. 입술을 지르문 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있던 키요시는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돌도 많이 먹혀줬다고.”

 

 돌만 먹힌다고 다가 아니잖아. 아키라가 복잡한 눈으로 키요시와 그가 가리키는 돌그릇을 보았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완전… 프로한테 하듯이 이겼잖아. 아키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아키라는 순식간에 침울해진 키요시의 표정을 포착했다.

 

 “난 갈게.”

 

 그제야 아차했지만 키요시는 단단히 마음이 돌아선 모양이다. 멀어져가는 키요시를 차마 붙잡지 못하고 아키라는 난감하게 바라만 보았다.

 

 

 

 

 키요시는 그날 이후로 침체되어 보였다. 본래도 대국에서 이겼을 때 좋은 표정이 아니었는데 요즘들어 더욱 공허한 표정인 것 같다면 아키라의 착각일까?

 

 상대가 복기를 요청하는데도 키요시는 묵묵무답으로 일관하다가 단호하게 돌을 놓고서, 그러니까 자신의 날카로운 수를 자제하기를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두고서 마치 저가 상처받았다는 듯이 빠르게 나가버리곤 했다. 대국실을 나서면서 한숨을 쉬는 것도 다반사였고 말이다.

 

 그랬던 키요시가 걱정되어 아키라는 어떻게 해야 키요시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타이틀 도전기가 세 개나 있어서 시간은 많이 안 나겠지만, 그래도 무슨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 키요시가 원하는 바둑을 찾아주는 건 어떨까? 아키라의 머릿속에 번뜩 생각이 스쳤다. 어렵겠지만, 아주 좋은 생각 같았다. 아키라가 작게 웃으며 키요시의 대국이 끝나는 날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홍수영은 사실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큰 대국일정이 세 개나 잡혀 있는 무척이나 바쁜 후지사키 키요시가 이번 행사에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후지사키 키요시….”

 

 그런데 한일 행사장에서, 자신이 이를 갈고 있던 것을 안 것처럼 정말로 떡하니 눈앞에 나타난 상대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졌습니다.’

 

 아직도 고개를 숙이던 키요시의 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분명 이기던 대국이었으면서! 그래서 홍수영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번 대국은 잊지 않았겠지? 오늘 이렇게 만난 거 이번엔 제대로 둬!”

 

 저지르고 나서 자신의 무례에 아차하긴 했지만, 그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상대를 만날지 모를 판국에 어물쩡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으므로. 불타는 홍수영의 눈을 키요시는 잠시 바라보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피곤해보이는 그 모습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홍수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당하지 않을 거야.”

 

 판이 깔렸다. 홍수영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상대와의 대국을 기다렸다. 아니, 기대했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다. 그런데 상대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숨?”

 

 한숨을 내쉬는 키요시의 모습에 홍수영은 속에서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나랑 대국하는 게 그렇게…!”

 

 그렇게 싫은 거냐며 따지려는 차에 홍수영의 말을 끊고 키요시가 손을 저었다.

 

 “피곤하니까 속기로 하자.”

 

 그 말은 사실인지 피로가 가득한 눈을 꾹 지르감으며 재차 한숨을 쉰다. 그래도 왠지 분해서, 홍수영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갈았다. 건방져. 그렇게 해도 자신을 이길 수 있다는 거겠지. 한국은 속기에 강하다. 그런데 일본인인 후지사키 키요시가 홍수영에게 속기로 승부를 걸었다.

 

 자신을 얕잡아보는 것만 같은 그 행태에 홍수영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행사관계자는 둘의 대국을 환영해주었고 특별히 둘만의 대국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대국의 시간이 다가오자 키요시는 피곤하던 기색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드러냈다.

 

 “…지도기 같이 어설프게 둘 생각은 하지 마.”

 

 그제야 홍수영은 분하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얼굴을 찌푸리곤 괜한 툴툴거림을 내뱉었다. 그에 화답하듯 키요시가 답하였다.

 

 “걱정 마.”

 

 역시 그도 바둑에 진심인 것이 틀림없다. 손사레까지 치며 코웃음 치는 것이 조금 재수가 없어보였지만, 그럼에도 홍수영은 상대가 이제야 제대로 둘 것 같아 만족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참하게 무너진 자신의 흑돌을 바라보며 홍수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분하다. 지고 싶지 않았는데.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중간부터는 어떻게 두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실력 차가 너무 나서, 홍수영은 분하고 또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홍수영의 표정을 바라보며 다시 피곤한 표정으로 돌아온 키요시에, 아키라가 걱정스레 그를 살폈다. 숙소에 갈 때까지 그 표정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침울해져만 가서 아키라는 머뭇머뭇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후지사키.”

 

 피곤하겠지만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키라의 부름에 키요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흔들리는 것이, 홍수영이라는 그 아이가 여간 신경쓰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내가 도와줄까?”

 

 그래, 역시 후지사키에겐 도움이 필요해. 아키라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분명 그 기풍을 바꿀 방법이 있을 거야.”

 

 상대가 상처받는 게 힘든 거라면, 그러한 기풍이 바뀌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아키라의 희망찬 마음과는 반대로 키요시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아키라의 말에 더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작게 중얼거리는 그 말을 듣고 아키라는 멈칫하였다. 이런,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그의 상태로는 수긍하기 힘들 것이다. 크게 낙심한 듯보이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가 쓰게 웃었다.

 

 “그래, 피곤하겠다. 어서 자.”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키요시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아키라는 조용히 불을 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알겠지? 후지사키를 절대 혼자 두지 마.’

 

 얼마 전 신신당부하듯 들었던 아키라의 말을 떠올리며 히카루는 저 멀리 보이는 키요시의 인영에 후다닥 걸음을 빨리 했다. 키요시의 주변에는 어느샌가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당연하겠지, 최연소 타이틀 보유자이니만큼 관심이 지대할만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키요시도 바랄까?

 

 답은 ‘아니오’였다. 오늘도 바둑관계자에게 둘러싸여있는 후지사키의 모습은, 남들은 모르겠지만 히카루에겐 상당히 피로해보였다.

 

 “후지사키! 너도 왔구나!”

 

 그래서 히카루는 부러 밝게 키요시를 불렀다. 사람들 틈에 싸여있는 키요시를 끌어내어 간신히 아키라의 대국장이 중계되는 대기실로 들어섰다.

 

 대국은 생각보다 심심했다. 그래서 히카루는 본의 아니게 키요시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얼마 전 들었던 아키라의 말을 토대로 키요시의 표정, 행동들은 지켜보았다.

 

 ‘우리가 도와주자. 키요시는 자신의 기풍을 두려워하고 있어.’

 

 아키라가 말했다. 히카루는 의아했다. 자신의 기풍을 두려워하는 바둑기사라니?

 

 ‘바둑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혼자 두면 또 의기소침해할 거야.’

 

 의기소침해한다고? 후지사키 키요시가?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먼젓말이 더 이상하다. 아니, 그야 물론 바둑은 좋아하겠지. 지금도 봐라, 이렇게나 아키라의 대국에 집중하고 있는데……. 집중하고 있나? 히카루가 키요시를 보았다. 키요시는 빤히 아키라의 대국이 중계되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쪽은 아닌 모양이다. 표정이 딱딱했다. 평소에도 저런 표정이었지만… 왠지 우울해보인달까? 히카루는 그래도 친구니까 자신의 보는 눈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키라의 말대로였다. 역시 혼자 두지 말자. 오늘 아키라의 대국이 끝나면 아키라의 집에 놀러가기로 했는데, 거기에 꼭 키요시를 데려가야겠다.

 

 

 

 

 히카루와 함께 아키라의 집에 방문한 키요시는 상당히 조심스러워보였다.

 

 “아무도 없어?”

 

 조용한 집안이 신경쓰였는지 묻는 키요시의 말에 아키라가 뒤늦게 아차하며 답했다. 부모님은 외국 세계대회 참가 건으로 인해 당분간 집에 안 계실 거라는 이야기와, 그러면 혼자 있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그 내용이었다.

 

 듣자마자 키요시는 푹 한숨을 내쉬며 힐끔 아키라를 보았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여 아키라와 히카루는 웃었다.

 

 “도우야가 애도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마.”

 

 히카루의 말처럼 아키라는 어른스러운 편인데다 다른 아버지의 제자분들이 많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크게 홀로 생활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걱정해주다니 후지사키는 상냥하구나. 마음 한 켠이 따듯해진 아키라가 걱정으로 머뭇거리는 키요시의 어깨를 꽉 붙잡아 돌려세운 뒤 가볍게 토닥였다.

 

 “걱정도 좋지만, 일단 들어가자.”

 

 

 

 

 후지사키 키요시는 정말 대단한 아이였다. 아니, 이제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업적을 세워서 사람들은 그를 대하는 데에 전보다 더 어려움을 느꼈다. 아직 미성년자인데 벌써 타이틀만 몇 개던가? 혼인보, 명인, 왕좌, 천원…. 게다가 이제 십단전 도전자로서 낙점되어 그 스케줄까지 맞춰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와중에 바둑관계자에게도 희소식은 있었다. 그 ‘후지사키 키요시’가 각종 행사에 거부감이 없다는 거였다.

 

 들이밀면 들이미는 대로 수락하니 큰 걱정은 없다. 대국 일정 같은 경우 까다로운 기사 둘이 만나면 서로 조정하는 데만도 골치였지만 후지사키 키요시라면 달랐다.

 

 “아, 알아서 잡아도 상관 없다는 말씀이셨군요…. 하하. 배려 감사합니다.”

 

 그래도 태도가 태도이니만큼 재수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관계자가 웃으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어른이 내민 종이를 대충 손으로 밀어버리는 통에 자신이 차린 예의가 상당히 무색해졌다.

 

 자신이 욕한 것을 들었을까? 나가면서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가는 그의 입가가 떨려왔다. 마치 비웃음을 숨기기라도 하는 모양새여서 관계자는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간만에 기분이 나아보이는 키요시의 상태에 아키라는 저 또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입가에 설핏 웃음기까지 도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 있을 십단전의 오가타 선생님과의 대국이 정말 기대되나보다, 하고 아키라가 생각했다.

 

 “자신만만하군.”

 

 오가타가 차가운 눈으로 키요시를 내려다보았다. 정식 대국이 있을 때면 예민해지는 그의 특성상 아키라에겐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처음 보면 무섭다고들 많이 이야기하였기에 아키라는 조금 걱정했다. 후지사키가 놀라지 않았을까? 하지만 예상보다도 더 키요시는 덤덤해보였다. 걱정이 되어 잠시 따라왔던 아키라가 안도하며 둘의 대국이 중계되는 대기실로 가기 위해 자리를 뜨려던 차였다.

 

 “십단 방어전은 5번 치러지지. 그 중에 단 한 번이라도 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오가타가 도발하였다. 명백한 도발. 아키라가 멈칫하며 키요시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신경이 날카로워서 내뱉은 말이라지만, 어린애한테 너무 한 거 아닌가 생각할 즈음이었다.

 

 “그렇다면….”

 

 키요시가 웃었다.

 

 “꼭 이겨주세요.”

 

 무서운 오가타 선생님을 상대로 떨지도 않고 말하는 키요시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키라는 그처럼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이….

 

 “…목이나 씻고 기다려라, 꼬맹아.”

 

 반대로 오가타를 더욱 도발한 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가타의 입새로 까득 무언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키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키요시와 오가타를 주시하였다. 후지사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라도 오해하겠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고, 때마침 호령되는 기록원의 대국 시작 알림에 아키라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며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후지사키가 긴장하는지 잘 보고 얘기해줘야된다? 나 먼저 대기실 가 있을게!’

 

 대체 대기실에 가서 이 사실을 히카루에게 어떻게 말해야할까. 긴장? 긴장이라고? 저도 이번 대국만큼은 키요시가 긴장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응, 긴장하지 않고 오가타 선생님을 상대로 잘 도발했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은가? 대체 어떻게 말해야 오해가 섞이지 않고 키요시의 의도대로 잘 전달이 될까 아키라는 한참이나 고민해야했다.

 

 

 

 

 십단전 첫 번째 대국은 후지사키 키요시의 승리로 끝났다. 얼핏 중계카메라로 본 키요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실망했을까? 실망했다면 무엇에 대해 기대하고, 실망한 것이었을까?

 

 어두운 표정을 두 손으로 감싸 숨긴 채 키요시가 작게 한숨을 내쉰 것이다. 역시 보이는 표정대로 원했던 바둑이 아니었나보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아키라도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키요시를 보았다. 그렇게 기대에 찬 얼굴을 했었는데, 끝은 원치 않는 자신의 바둑이라니.

 

 혹여나 좌절하지는 않았을까 아키라가 히카루와 함께 서둘러 대국실로 달려갔을 때였다.

 

 “앞으로 4국이다. 웃음이 싹 사라지게 해주마.”

 

 서슬퍼런 오가타의 음성이 들렸다. 짧은 탄식이 아키라와 히카루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오가타 선생님께 찍혀도 단단히 찍힌 모양인데, 후지사키…. 대체 표정이 어땠기에 또 무슨 어마어마한 오해를 산 것일까.

 

 자신들도 처음에 보았을 때 키요시에게 오해했던 것을 송두리째 잊은 채로 아키라와 히카루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살벌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오가타를 슬쩍 피한 채 둘은 키요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키요시의 기분을 풀어주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다! 바다로 가자!”

 

 여행 이야기는 그러다 돌연 튀어나온 조금은 충동적인 계획이었다. 히카루의 말에 아키라가 고개를 갸울였다. 바다도 좋지만 선선한 나무 아래, 그러니까….

 

 “계곡도 좋지 않을까?”

 

 강 따라 부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풀내음을 만끽하며 두는 바둑이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것도 좋겠다. 계곡으로 가자, 그럼…. 가자, 후지사키! 간 김에 온천 어때? 맛있는 것도 먹고!”

 

 그것은 키요시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새 기분이 풀어져보이는 그의 표정에 아키라와 히카루는 즐겁게 여행 계획을 짰다. 그래봐야 1박2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친구들끼리 처음 가는 여행이니만큼 둘은 설레는 마음으로 떠들었다. 조용히 있기는 했지만 키요시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가기 싫다고 하거나, 화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간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눠서 잠이 잘 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퀭한 아들의 눈가에 시선을 두며 아버지는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무뚝뚝한 아들은 걱정스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의 잠결이라 봐도 좋을 만큼 느린 걸음으로 차에서 내려 행사장엘 들어섰다. 몇 번 과거에도 참가한 적 있었던 지도기 행사였다. 장내가 소란스러운 가운데 가장 먼저 키요시를 발견한 한 명의 노인이 화색을 띠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이구, 우리 손주랑 닮았네그려!”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냥 던지고 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닮기는 했다. 일단 나이가 십대라는 점이. 노인은 고개를 주억이며 키요시의 손을 꼭 붙잡고 근처 바둑판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바둑 좀 알려주게! 내 손주도 바둑을 아주 좋아하는데, 특히 자네 팬이라니까.”

 

 물론 그의 손주는 누가 도우야 아키라고 누가 후지사키 키요시고 누가 신도우 히카루인지 이름도 잘 모르지만 그 세 사람이 바둑계 최고의 인기스타라는 것을 알기는 아니까 된 거 아닐까. 그 마저도 자신이 입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서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알 게 뭔가.

 

 “그럼, 잘 부탁하네. 살살 부탁해~”

 

 은근 슬쩍 친한 척 말을 놓으며 노인은 험험, 헛기침을 했다.

 

 

 

 

 자신의 할아버지 또래와의 지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이 그리도 기뻤을까. 드물게도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지도기도 제대로 뒀고… 아, 저번에 보니까 오가타 선생님이랑 두었을 때 수비도 가능해졌으니까. 이번엔 정말 내가 도와줄게. 기풍을 바꿔보자. 가능성은 충분해! 정말 놀라운 발전인걸!”

 

 기회는 이때다싶어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굳어지는 키요시의 안색에 아키라가 아차했다. 어디, 어느 부분을 실수한 거지? 아, 아직 오가타 선생님과의 대국이 잊혀지지 않았을 텐데 섣불리 이야기를 꺼낸 것이 잘못이었을까? 초조해진 아키라가 어색한 말씨로 말을 고쳤다.

 

 “그래도 십단전 두 번째 대국에선…!”

 

 머뭇거리며 다음 말을 골랐다. 이길 수 있을 거다? 이건 너무 뻔한 말이었다. 더 수비적으로 둘 수 있을 거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지라는 것 같지 않은가. 고민하던 아키라가 서툴게 말을 끝맺었다.

 

 “더, 잘 둘 수 있을 거야!”

 

 어째선지 더 우울해진 키요시의 표정에 아키라는 식은땀을 흘렸다.

 

 

 

 

 “졌습니다.”

 

 숙여지는 오가타의 고개에 아키라와 히카루가 크게 숨을 돌렸다. 마치 자신들이 대국하는 것마냥 집중하고 있던 것이 탁 풀리며 자연히 나타난 반응이었다.

 

 2연승. 한 번만 더 이긴다면 정말로 오가타에게서 십단 타이틀을 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웬만한 타이틀은 모조리 휩쓴 초신성의 루키가 될 것이다. 바둑계의 역사가 새로 쓰일 수준이란 말이다.

 

 그런데 후지사키 키요시의 표정은 왜 저런가?

 

 모든 이들의 의문이었고, 그 만큼 말도 많았다. 크게 기뻐보이지 않는 표정 때문에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아키라와 히카루는 그 이유를 얼핏 알 것도 같았다.

 

 ‘원하는 바둑이 아니기 때문’에.

 

 복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가버리는 키요시의 행동에 둘은 당황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해명할 거라는 건?”

 

 비뚜름한 표정의 오가타가 안경을 쓸어올리며 아키라와 히카루를 바라보았다. 대국이 끝나자마자 뛰쳐나가버린 키요시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얹짢은 와중 이렇게 시간을 내서 두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키요시에 대해 오해할 거 같다며 해명할 것이 있다고 저를 붙든 두 사람 때문이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오가타의 표정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말이 되나?”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가,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던 바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렇다고 치자고. 오가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대국 후에 비웃은 건?”

 

 “그게… 후지사키가 좀 서툴러서.”

 

 아키라와 히카루가 둘이 머뭇거렸다. 어떤 기분인지 아키라는 알 것 같아서였다. 문득 둘의 머릿속에 키요시의 표정이 떠올랐다. 누가봐도 비웃는 것처럼 보일 게 분명한 표정이 말이다. 어깨가 살짝 떨린다던가, 입가가 일그러진다던가, 그걸 어설프게 가리고 고개를 돌린다던가……. 대답하지 못하는 둘을 향해 오가타가 그것보라며 혀를 찼다.

 

 “차라리 웃은 게 아니라 운 거였고, 도발한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해라.”

 

 “어….”

 

 “음….”

 

 묘하게 정곡이었다. 아키라와 히카루가 부정하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이며 오가타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그 분위기에 오가타는 할 말을 잃었다.

 

 “…진짜냐.”

 

 

 

 

 도우야 고요는 아들인 아키라가 데려온 아들 또래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후지사키 키요시.

 

 작년의 혼인보전을 시작으로 얼마 전 치러진 십단전까지… 구와바라, 오가타를 제치고 순식간에 최정상까지 치고 올라온 초신성의 소년. 고요는 일전에도 우연찮게 넷바둑으로 그와 대국한 경험이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후지사키 너와는 늘 다시 한 번 제대로 두고 싶었단다.”

 

 그러나 그것은 인터넷 바둑. 실제로 마주하고 앉아 두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고요는 기대되었다. 앞으로 벌어질 대국이, 그가 수놓을 돌들이 말이다. 고요가 잔잔하게 웃었다.

 

 “은퇴 후로 이런 점이 좋아. 두고 싶은 대국을 실컷 두게 되는구나.”

 

 그에 아랑곳않고 크게 숨을 고르며 바둑판에 시선을 집중하는 키요시의 모습에 고요는 저 또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입을 뗐다.

 

 “그럼, 잘 부탁하마.”

 

 “잘 부탁드립니다.”

 

 푹 숙여지는 키요시의 고개를 고요가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대국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가타가 방에 들어섰다. 그 기척을 읽지 못한 키요시가 바둑판에 집중하는 사이 아키라와 오가타가 눈을 마주쳤다.

 

 ‘저 표정이 비웃는 게 아니라고?’

 

 다름아닌 키요시의 입가가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가타의 눈빛을 읽어낸 아키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국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야 끝이 났다. 그 후 복기를 하는 데에만도 서너 시간이나 걸렸다. 대국과 토론까지 합쳐 벌써 여섯 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삭막한 분위기에 키요시가 조금 피곤해보여서 아키라가 조심스레 입을 떼려는데, 오가타가 돌연 키요시에게 물었다.

 

 “이 수를 둔 이유는? 명인께서 이쪽에서 이렇게 둘 걸 미리 예측하고 둔 건가?”

 

 조금 따지는 듯한 투였다. 바둑에 관해선 상당히 예민해지는 오가타를 알기에 아키라는 괜찮았지만 키요시가 듣기에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는 말투여서, 아키라가 서둘러 키요시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오히려 마치 기다린 것처럼 그 입이 열렸다. 그리고 나온 음성은 너무나도 덤덤하였다.

 

 “그냥 두었습니다.”

 

 아키라의 두 눈이 깜빡였다. 오가타도, 고요도 아무런 말도 잠시간 잇지 못하였다. 이윽고 오가타는 탄식했다.

 

 “보였거든요, 그 자리가.”

 

 바람결에 흘러가는 낙엽을 이야기하듯 평온한 말투와는 달리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그냥 보였다?”

 

 믿기지가 않아서 오가타가 되뇌었다. 답을 얻고자한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나도 태연히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냥 보이는 곳에 두었습니다.”

 

 간결한 그 말이 오가타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허탈한 웃음으로 오가타는 입가를 쓸었다.

 

 이 녀석은 진짜다.

 

 천재, 그 말은 이 소년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래서였군그래.”

 

 “전보다 더 성장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재능인줄은 차마 몰랐구나.”

 

 오가타와 고요가 나란히 읊조렸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그제야 느꼈는지 고요가 잔잔하게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그 재능이 후지사키 네게 내려져서 참 다행이야. 흠. 오가타에게 그런 재능이 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하하….”

 

 농담이었지만 마냥 농담같지는 않았다. 뼈 있는 그 말에 아키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오가타 선생님이라면 엄청 으스대셨을지도 몰라요.”

 

 그리곤 한 마디를 톡 덧붙였다. 아키라, 저 녀석이…. 오가타는 끙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었다. 그 사이 키요시 또한 웃음이 터졌는지 입가를 두 손으로 가린 채였다.

 

 “웃지 마라, 후지사키.”

 

 이번에도 웃는 게 아니라고 변명할 것인가? 아키라를 돌아보니 슬쩍 눈길을 회피하고 있다. 오가타가 눈썹을 삐죽 들며 재차 호명했다.

 

 “후지사키.”

 

 멈칫한 키요시가 이내 손을 내리고 지그시 오가타를 바라보았다.

 

 “안 웃었어요.”

 

 근데 입가가 떨리는 것은 왜인지. 오가타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변명도 않겠다는 모양새에 맥이 빠졌다. 이건 화낼 일은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오가타는 체념하였다.

 

 

 

 

 하나둘씩 쌓여가는 행사목록에도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 키요시의 모습에 바둑관계자는 저 태연함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온갖 행사들을 끼얹었다. 그리고 비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방어전이 있을 때는 행사가 많지 않습니다… 아차, 타이틀이 많으셔서 그렇지도 않겠군요.”

 

 웃으며 하는 이야기에도 키요시는 빤하게 행사목록만 바라볼 뿐 입하나 달싹하지 않아 비꼬고자하는 바 모두 헛수고가 되었지만 말이다.

 

 “특별히 사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일단 다 참석하겠다고 전달하겠습니다.”

 

 쐐기를 박듯이 이야기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아랑곳않고 관계자가 챙겨주는 스케쥴을 모조리 챙겨갈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설핏 웃으며 인사하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는 그 뜻이 아니라고 아키라와 히카루에게 골백번 들었음에도 빈정이 상했다. 마치… 그래.

 

 “재주껏 이겨보란 거냐.”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새로이 열린 혼인보 타이틀 방어기전에서, 키요시는 아키라와 히카루의 말에 따르면 ‘반기는 표정’을 지었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오가타를 바라보았다. 오가타가 코웃음을 쳤다. 저게 어딜 봐서 반기는 표정이고 당황한 표정이란 말인가? 뚱하다못해 비죽 솟은 눈매로 인해 사나운 키요시의 표정은 평소와 같아서, 아니 오히려 더 불퉁한 편에 속해서 오가타는 되레 저가 더 황당했다. 뒤늦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진심이긴 한 모양이지만, 오가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제와서 고개 숙여서 인사해봤자 비꼬는 거 다 티 난다.”

 

 그래서 혀를 차며 말했다. 멈칫하며 키요시가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괘씸한 마음에 오가타는 그런 키요시를 외면한 채 대국실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첫 번째 대국이 끝나고, 자꾸만 거슬리게 알짱거리는 시선에 오가타가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왜 쫓아와?”

 

 “그러니까….”

 

 무언가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꼼지락거리는 모양새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오가타는 비죽 눈썹을 치켜들고 되물었다. 차마 시비를 걸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지는 못하고 좀 더 돌려서 말이다.

 

 “평소엔 제대로 안 하던 복기를 오늘은 하고 싶었나보지?”

 

 오늘따라 오가타가 먼저 복기를 물렸으니 제 딴에는 신경이 쓰였던 것이리라. 입술을 꾹 지르무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는 인심 썼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 좋아. 아키라와 신도우 녀석이 대기실에 있을 테니 불러다가 다시 한 번 복기해보는 것도 좋겠지.”

 

 그제야 쫓아오는 것을 멈춘 키요시에, 오가타가 그럼 그렇지 싶은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복기가 어지간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누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후지사키 키요시라니. 그런데….

 

 “복기하자면서, 왜 가만히 있지?”

 

 오가타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제야 아키라부터 히카루가 하나둘씩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지사키가 먼저 복기하자고 할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그제야 복기를 시작하려는 듯 돌을 쥐는 키요시의 모습에 셋은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키요시가 왜 복기를 그렇게나 하고 싶어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 큰 집을 공략하겠다는 거지?”

 

 오가타와 아까 대국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두기 시작한 키요시에게 셋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은 곧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이걸 이렇게…….”

 

 “도대체 몇 수 앞까지 읽은 거야?”

 

 오가타가 침묵하고 아키라와 히카루가 탄식했다. 그렇게 키요시의 주도 하에 시작된 복기는 밤이 늦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지속되었다.

 

 

 

 

 어느덧 혼인보 방어기전의 승패가 확정될 수 있는 네 번째 대국일이 다가왔다. 오가타는 대국실 문앞에서 가만히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키요시의 모습에 고개를 갸울였다.

 

 “뭐하냐?”

 

 아, 작게 탄식한 키요시가 고개를 들고 두 눈을 깜빡이며 오가타를 바라보았다.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던 키요시가 뒤늦게야 답했다.

 

 “그냥, 기도했어요.”

 

 기도? 의아함에 오가타가 되물으며 미간을 찌푸리는데 키요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차게 대꾸하였다.

 

 “오가타 선생님이 이기게 해달라고요.”

 

 오가타가 까득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아주 와락 구겨지고 말았다. 녀석의 저런 행태에는 이제 익숙하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라.

 

 “너….”

 

 오가타가 간신히 욕지거리를 삼켰다. 저건 아무리봐도….

 

 “비꼬는 재주가 아주 탁월하구나.”

 

 비꼬는 거였다. 그래. 녀석은 바둑뿐만 아니라 비꼬는 데에도 재능이 아주 탁월하였다. 덕분에 오가타는 아키라와 히카루가 해주었던 키요시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도 잊고서 아주 속을 활활 불태웠다. 약이 올라도 아주 단단히 오르고 만 것이었다.

 

 

 

 

 결국 이번 4국도 오가타의 패배로서 혼인보전은 후지사키 키요시의 방어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대국이 끝난 후, 안면을 모조리 손으로 가리고 있는 탓에 키요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얼굴일까. 역시 비웃음일까? 오가타의 패배에 대한… 아니, 아키라나 히카루의 말을 빌어보면 비웃음보다는 슬픔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기뻐하지 않지? 오가타의 패배란, 키요시 본인의 승리란 말과도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그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실력마저 성장했다.

 

 “어떻게 거기서 더 성장할 수 있는지.”

 

 허탈한 오가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키요시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비웃음도 슬픔도 기쁨도 보이지 않는 무표정함이 감돌고 있었다. 오가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말을 덧붙였다.

 

 “다음 명인전은 아마도 아키라 녀석이 될 확률이 높아.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오가타는 진심으로 바랐다.

 

 “기성, 혼인보, 천원, 왕좌, 십단 그리고… 이번에 곧 있을 명인까지 완벽히 방어해내길 바란다.”

 

 후지사키 키요시, 그 끝이 어디까지 갈 지 말이다. 그제야 사람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왔는지 빤하게 저를 바라보는 키요시의 시선에 오가타가 설핏 웃었다.

 

 “이렇게 말하니 이제야 긴장이 좀 되나보지.”

 

 “긴장이 아니라….”

 

 “아니기는.”

 

 무어라고 작게 키요시가 중얼거렸다. 뒷말을 듣지는 못했으나 들었다가는 또 기분이 상할 것 같아 오가타는 코웃음 치고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오가타는 의문의 종이를 받고 한참이나 고민했다. 이게 편지인지 쓰레기인지 도통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비꼬는 게 아니라고?”

 

 어이가 없어서 오가타가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편지에는 받는 사람인 오가타의 이름마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적혀있었으니까. 유치원생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 하, 참.

 

 “차라리 그 실력이 뻥이라고 해라, 참나.”

 

 그러한 오가타의 말에 키요시가 복잡미묘한 눈으로 오가타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처라도 받았나. 오가타는 머쓱해서 입가를 쓸었다.

 

 “그건 너무 앞서갔어요, 오가타 선생님.”

 

 아니나 다를까 곧장 반박해오는 아키라에 오가타가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 그건 너무 앞서간 거겠지. 운만으로 5관왕에 올라서기란 벼락 맞을 확률보다도 적을 테니……. 그 실력이 거짓이라니 말이 안 되겠지.

 

 

 

 

 “나를 꼭 이겨줘.”

 

 기원에 들어서자마자 아키라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신파를 찍듯이 간절한 눈으로 아키라를 바라보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가 황당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말이 간절하다는 거지, 실제로 보면 아주 비꼬는 것이나 진배 없다. 그런데도 아키라는 알겠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되레 기뻐했다.

 

 “열심히 해서 꼭 너와 좋은 대국을 둘 수 있도록 노력할게!”

 

 “기대할게. 이제 놓자.”

 

 “네가 나를 인정해줬다는 게 기뻐서 그만….”

 

 “넌 원래 잘 뒀잖아.”

 

 얼씨구. 오가타가 황당하건말건 둘은 둘만의 세상에 아주 푹 빠져있었다.

 

 “쟤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생각이냐?”

 

 “하하, 저한테 물으셔도…. 그래도 아키라는 정말 기뻐서 그럴 거예요. 후지사키가 상대로써 인정해줬잖아요.”

 

 오가타의 꿍시렁거림에 히카루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가타는 코웃음치며 그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한참이나 바둑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서 밤 늦게서야 해산했다. 가장 먼저 집에 간 것은 키요시였다. 집이 제일 멀었기에 그들은 순순히 키요시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남아서 뒷정리를 하는데, 히카루와 아키라가 조금 전 의견다툼이 있었던 것을 끝까지 늘고 붙들었다.

 

 “허허, 그래도 라이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지.”

 

 그런 다툼도 그들을 지켜보던 어르신들에겐 좋게 보였나보다. 통쾌하게 웃는 소리에 그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지막판을 두고 있던 두 어르신이 그럼, 그럼.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은 둘이서 두는 거니까. 대등한 사람이 있어야 만족스러운 대국을 함께 그려나갈 수 있을 테니.”

 

 히카루가 멈칫했다.

 

 “대등한 사람이요?”

 

 “그래. 그래야 더 재밌거든. 지금처럼 말이야. 자! 내가 이겼수!”

 

 “이런.”

 

 히카루의 물음에 대꾸해주곤 한 노인을 킬킬대며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상대편 노인이 이마를 짚으며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히카루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바둑의 신은 외롭겠네요.”

 

 바둑의 신? 오가타가 의아한 표정으로 히카루를 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키라도 의아한지 히카루를 보았다.

 

 “대등하게 둘 상대가 없잖아요.”

 

 아, 그런 얘기였나. 아키라도 오가타도 고개를 주억였다. 그럴만도 하다. 바둑의 신이라. 오가타가 잠시 허공을 보며 사색에 빠졌다. 아이다운 발상이군. 몸은 컸지만 아직 어린애처럼 보이는 히카루의 모습에 오가타가 피식 웃었다.

 

 

 

 

 가을이 다가왔다. 명인전의 시작을 알리는 낙엽비에 오가타는 감상에 빠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명인께서 은퇴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고요의 은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리며 오가타가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그런 그의 시야에 익숙한 인형이 잡혔다.

 

 후지사키 키요시.

 

 까득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아 담배를 짓이겼다가 입가에 힘을 풀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놈의 꿍꿍이는 대체 좀잡을 수가 없단 말이지. 일전의 편지를 떠올렸다가 다시 오르는 혈압에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곧 녀석들의 대국이 있는데 그 생각이나 하자. 오가타는 곧 있을 아키라와 키요시의 명인전 제 1국을 떠올리며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했다. 아키라는 그간 많이 성장했다. 자신이 질 때가 종종, 아주 종종 있을 정도로 말이다. 과연 그 후지사키를 이길 수 있을까…….

 

 

 

 

 당연한 결과일까. 명인전 제 1국은 후지사키 키요시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키요시는 이번에도 역시 기뻐보이지 않았다. 패한 아키라쪽이 더 기뻐보였달까.

 

 “후지사키는 여전히 강하구나. 그래도, 나도 많이 강해진 거지?”

 

 반짝이는 눈으로 키요시를 보는 아키라에 오가타가 조용히 시선을 돌려 키요시를 주시했다.

 

 가만히 아키라를 마주보는 키요시의 표정이 어딘가….

 

 부러워보여? 오가타가 미간을 찡그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키라도 그런 키요시의 시선을 느꼈을까? 글쎄. 그것은 모르겠지만 아키라는 자신의 진심을 가감없이 표현하였다.

 

 “덕분에 매일이 즐거워. 너와 함께하면서 새로운 수를 발견하고, 진심을 다한 대국을 만족스럽게 둘 수 있어서 너와의 대국은 늘 재밌어.”

 

 아키라의 찬사에 키요시는 부끄러운 것처럼 외면했다.

 

 한 번 보이기 시작하니, 미묘한 키요시의 태도는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그후 치러진 천원과 왕좌전에서도 그렇고…. 그러고보면 그 전에도 늘 승리 후에 후련해보인다거나, 기뻐보이는 기색은 거의 없었다. 비웃으면 비웃었지. 아니, 비웃는 게 아니고 슬퍼한 거라고 했으니 다른가. 오가타가 바로 얼마 전 있었던 대국에서의 신경전을 떠올렸다.

 

 “안 나오셨어도 되는데 말이지. 많이 피곤해 뵈는데 집에 가서 잠이나 주무시는 게 어떨는지요? 아직 성장기니까 푹 숙면을 취해야할 텐데.”

 

 이치류 전 기성이 비꼬듯이 웃으며 키요시에게 말하자, 키요시가 덤덤하게 바라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마치 같잖은 도발에 코웃음 치는 것과 같아서 오가타는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 비웃는 걸로 보였었다. 저렇게 한숨처럼 웃는다? 그게 비웃은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번에도 말하는 것 봐라. ‘그러게요?’ 짧지만 아주 태연한 도발이지 않은가. 오가타가 거보란 듯이 비소를 지었다.

 

 애초에 웃지 않았다는 전제는 오가타에게 없었으므로, 오가타는 그렇게 확정짓고서 생각을 물렸다. 아직 아키라와 히카루의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행사마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매번 보이고는 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오겠거니싶었다. 얼마나 많은 행사를 뛰는 걸까? 히카루는 궁금했지만 알아서 하겠거니싶어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키요시는 봉사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역시 착한 아이다.

 

 “아, 후지사키!”

 

 아니나 다를까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떡하니 보이는 키요시의 모습에 히카루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그리곤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벅찬 마음으로 입을 뗐다.

 

 “이번에 기성전 리그에 진출했어. 도우야 녀석도 이겼다구!”

 

 뿌듯한 표정으로, 저를 마주보는 키요시에게 히카루는 자랑하듯 엣헴거리며 말했다. 장하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여준 키요시 덕분에 히카루가 더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아직 마지막 결정자가 된 건 아니지만 꼭 올라갈게, 후지사키!”

 

 저번 명인전처럼, 꼭 후지사키와 공식대국에서 두고야 말리라 다짐하는 히카루였다. 속으로 열심히 열의를 불태우는 히카루에게 키요시가 나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어서 어떤 이야기인가 했더니.

 

 “신도우. 이따가 도우야 녀석이 오면 너희 둘이 나 대신…….”

 

 그 이야기였구나. 지도기 이야기가 뻔한 말에 히카루가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이제 잘 하면서 왜 그래? 그때 어린 애가 울었던 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상냥하기는. 히카루는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팔뚝으로 장난스럽게 키요시를 밀쳤다. 잘 두지도 못하는 지도기를, 매번 두기 위해 행사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일지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나라면 절대 못해.”

 

 생각만도 귀찮아서 히카루는 진저리를 쳤다. 그런 히카루에 키요시가 머쓱하게 뒷목을 감싸쥔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냐….”

 

 크게 내색한 것은 아니지만 히카루에게는 잔뜩 민망해할 그 속이 뻔하게 보여서, 키득거리며 재차 그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에이, 다 알아.”

 

 키요시의 한숨에 다시 웃음을 터트린 히카루였다.

 

 

 

 

 후지사키 키요시가, 비겼다. 도우야 아키라를 상대로. 정말 아주 드물게 나타는 경우였다. 서로 단수를 칠 수 없는 경우, 흑돌과 백돌 모두 완생일 경우 ‘비김’ 즉 ‘빅’으로 상정하고 대국이 끝난다.

 

 그만큼 서로 실수도 없었고 치열한 싸움이었단 말이다. 그 정도로 성장한 아키라도 대단하지만 그 대국을 치른 키요시의 반응이 더욱 대단하였다.

 

 “다음엔… 좀 더 제대로.”

 

 드물게 격양되어보이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가 놀랐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불타는 듯한 눈으로 저를 보는 키요시에 아키라가 저 또한 벅찬 마음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엔 꼭 이겨보일게. 너도 네 말대로, 제대로 두어줘.”

 

 몇 년 전에 일부러 져주었던 키요시를 알고 있는 아키라에게 이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변화였다. 그런데.

 

 “어렵다…. 그때는 정말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겨버렸고, 이번엔 져버렸네.”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려 애써 웃는 아키라의 모습이 신경쓰였을까, 키요시가 힐끔 아키라를 보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슨 말일까? 히카루는 궁금하여 잠자코 기다렸다.

 

 “네가 이기면….”

 

 이기면? 잔뜩 대국을 두게 해주겠다? 아니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처음으로 키요시가 내건 조건에 히카루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키요시를 보았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내 게임CD 하나 줄게.”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키라가 멈칫하고 키요시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이 엄청났다. 아니, 사실 히카루도 그와 같은 표정이었으므로 할 말은 없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당연히 키요시니까 바둑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게임CD? 뒤늦게 머릿속을 뒤져보던 히카루가 지난 날을 떠올렸다.

 

 계곡에 놀러간다며 키요시의 집에 쳐들어갔을 때, 방 한 켠에 쌓여있더 수많은 게임CD들. 그래, 그게 있었지. 그렇구나 키요시에게는….

 

 게임이 바둑만큼이나 좋은 거구나.

 

 의외의 면모에 히카루가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분위기가 진지했기 때문에 차마 소리내어 웃지 못하고 히카루는 간신히 입가를 틀어막은 채 책상 위에 엎드렸다.

 

 웃으면 안 된다. 웃으면 안 돼. 후지사키는 지금 진지하다. 속으로 되뇌는데 또다시 키요시의 음성이 들렸다.

 

 “…두 개 줄게.”

 

 아무런 대답이 없는 아키라가 신경쓰였던가, 보상이 조금 바뀌었다. 히카루는 더는 참지 못할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키라 또한 웃음을 참느라 답이 없는 게 분명했다. 히카루가 슬쩍 아키라를 돌아보니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울상을 지었다.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진정해보려 후하후하 호흡을 고르는데 재차 음성이 들렸다.

 

 “세 개… 줄게.”

 

 어째선지, 준다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본인이면서 목소리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만 가서 아키라가 서둘러 손을 뻗어 키요시를 막았다.

 

 “괜찮아. 안 줘도 돼.”

 

 단호하게 거절하고서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아키라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보이는 키요시에게 말을 덧붙였다.

 

 “마음만, 마음만 받을게.”

 

 흐흑.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키요시가 들을까, 히카루가 흔들리는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 상황에서 웃음을 참고 말을 꺼낸 아키라가 대단할 지경이었다. 역시 가까이 지내보니 진실을 알겠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이지만 생각보다 키요시의 표정은 단순하고 다양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 키요시는 제 또래의, 평범하고 상냥한 자신의 친구였다.

 

 

 

 

 후지사키 키요시의 천원, 왕좌, 명인전의 방어전은 훌륭하게 끝이 났다. 도우야 아키라와 한 번 비긴 명인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한 것이다.

 

 그런 완벽한 키요시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 글씨가…….”

 

 글씨였다. 분명 ‘오가타 선생님께’로 보이는 참담한 글씨를 보며 아키라가 탄식하고 히카루가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 일부러 중간 기록 적는 봉수도 내가 하려고 노력했었는데.”

 

 밝히지 않았던 진실이 히카루의 입새로 흘러나왔다. 아키라는 공감한다는 듯이 침묵했다. 히카루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키요시에게 말했다.

 

 “아, 차라리 선물을 드려. 담배를 피우시니까 고급 라이터 같은 거 어때?”

 

 그 의견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고집있게 고개를 젓는 키요시에게 말이다.

 

 “난 편지가 좋아.”

 

 그래. 마음은 가상한데, 받는 사람은 그게 편지인줄 구분이 안 간다고. 얼마나 한 자 한 자 꾹꾹 공들여 적었는지 옆에서 모두 지켜본 두 사람은 그 편지를 받게 될 이에게 안타까움을 표하였다.

 

 

 

 

 키요시가 바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추호도 상상치 못하였다.

 

 “후지사키, 너 이걸 다 하는 거니?”

 

 우연찮게 바둑관계자실에서 마주친 키요시의 모습에 한달음에 다가온 아키라가 사색이 되어서 그의 손에 들린 키요시의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경악하는 아키라를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키요시에게 아키라가 버럭 화를 냈다.

 

 딱 봐도 훤했다. 행사를 마다않는 착한 키요시에게 바둑계 행사관계자가 억지로 모든 행사를 떠맡긴 것이 분명했다!

 

 “거절을 했어야지! 이걸 어떻게 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스스로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아니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심한 처사였다.

 

 “본원에서 널 놀리려는 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서 연신 입을 놀리던 아키라의 시야에 키요시의 표정이 들어왔다. 아키라의 말을 차마 못한 채 머뭇거리며 입을 뻐끔거리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네가 하고 싶다고 했다고? 이걸 다?”

 

 설마 그러랴 싶어서 물어본 건데 표정이 심상찮다. 변명하듯 고개를 젓기는 하였으나 그 속이 뻔히 보여서 아키라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의 일이니 자신이 간섭할 것은 아니었다.

 

 “내 도움은 필요 없겠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미안해, 후지사키.”

 

 하지만, 빼곡한 키요시의 일정표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기에 아키라는 참지 못하고 키요시의 손을 붙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안 되겠다. 아버지한테 가자. 의견을 구해봐야겠어.”

 

 

 

 

 “뭐? 그 많은 걸 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오가타의 표정에 아키라가 제 말이 그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행사는 줄이는 게 좋겠구나.”

 

 고요가 걱정스럽게 언질해주었다. 키요시가 머뭇거렸다. 그러기는 힘들단 듯한 기색이 역력해서 오가타와 아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참여하고 싶다면… 보자.”

 

 어찌되었든 키요시의 일이고, 그의 의사가 그러하니 그것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요는 턱을 쓸며 키요시의 일정표를 훑어내렸다.

 

 “이거랑, 이건 빼도 되겠군요.”

 

 곁에서 지켜보던 오가타가 거들었다. 타이틀기전을 주관하는 후원자들이 개최하지 않는 작은 행사들을 콕 집어 펜으로 지워낸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키요시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차라리 다 빼주세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괴롭다는 듯이 말이다. 결국 세 사람은 그런 키요시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고요가 말리는 것을 포기했고, 오가타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젊으니 괜찮기야 하겠지. 이렇게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걸 보면 아키라나 히카루의 말이 맞는 것도 같고. 대국 상대에 대한 예의는 밥 말아먹은 것 같은데 말이지. 후지사키 키요시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아까부터 푹푹 한숨을 쉬어대는 통에 저까지 답답해진 오가타가 일갈했다.

 

 “그렇게 불안있는 티 팍팍 내지 마라. 나도 아키라가 부탁한 거 아니었으면 네 녀석이랑 같이 안 있었어.”

 

 누군 좋은 줄 아나. 비죽 솟은 눈썹이 오가타의 심리 상태를 대변해주었다. 그것을 보았는지 키요시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건 정말 잠시였다. 다시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오가타가 가늘게 뜬 눈으로 키요시를 흘겼다. 키요시는 눈가를 쓸며 피곤한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오가타는 어이가 없었다. 요것 좀 봐라?

 

 “땅 꺼질라. 한숨은 내가 쉬어야지. 원래 참가하지도 않는 행사를 너 떄문에 참가한답시고 행차해줬는데 말이야.”

 

 피곤한 건 오히려 오가타였다. 바로 어제 술자리가 있어서 피곤한 마당에 아키라의 부탁 아닌 부탁에 마음이 걸려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해준 것이니까. 물론 이제 열일곱, 열여덟 된다지만 아직 애처럼 보이는 녀석이 고생을 한다니 그것도 좀 걸리기도 하고. 오가타는 몰려드는 인사들에게 가볍게 허례허식으로 안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키요시가 입가를 가리고 작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식은땀도 조금 흘리는 것 같아서 오가타가 혀를 찼다.

 

 아무리 젊고 어려도 무리하면 몸살이 나는 법이었다.

 

 

 

 

 결국 아키라는 키요시를 협회로 데려가 모든 행사일정을 조절해주었다. 대체로 꼭 참여해야하는 행사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취소해버린 것이다.

 

 “후지사키, 담요라도 줄까?”

 

 발그레한 키요시의 볼을 바라보다 아키라가 물었다. 역시 식은땀도 조금 흘리고 있고, 추워보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부르튼 입술을 달싹이며 거절하려는 키요시에게 아키라가 후다닥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히카루가 미리 준비해둔 따듯한 차를 건네었다.

 

 “됐어.”

 

 이런 대우가 민망한지 찻잔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미간을 찡그리는 키요시였다. 제대로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고 히카루가 그런 키요시의 손에 찻잔을 쥐여주었다. 역시나 이번엔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고 받아드는 그 모습에 아키라가 쓰게 웃었다.

 

 왜 호의를 곧장 받지 못할까? 여태껏 그런 대우를 해주었던 사람이 적어서겠지 싶은 마음이 드니 아키라는 키요시가 안타까워졌다.

 

 

 

 

 신도우 히카루와 후지사키 키요시의 기성 타이틀전이 시작되기 직전.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아팠던 키요시를 상기해내며 히카루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몸은 괜찮아?”

 

 키요시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만히 히카루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꼭 쥐어보였다.

 

 “꼭 이겨.”

 

 진지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키요시의 눈동자에 히카루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대국을 하는 사이에 나누는 대화라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치만 그게 키요시의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알았어. 너도 꼭 이겨, 후지사키.”

 

 히카루 또한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였다.

 

 

 

 

 “역시 이길 수가 없네.”

 

 기성전 제 1국. 히카루 자신의 패배로 끝난 결과에 쓰게 웃었다. 키요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길 수 있어.”

 

 어쩐지 조금 화가 난 음성으로 말이다. 히카루가 멍하니 키요시를 보았다. 마주한 키요시의 까만 눈동자는 무척이나 확고한 믿음과 바람을 담고 있어서, 히카루는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 언젠가는… 네게 이길 수 있겠지?”

 

 실없이 웃으며 히카루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작아진 히카루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키요시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가라앉았던 히카루의 기분이 풀리고 그 마음이 따듯해졌다.

 

 

 

 

 도우야 명인의 기원엔 이제 거의 암묵적인 정기모임이 형성되었다. 도우야 아키라, 신도우 히카루, 후지사키 키요시… 그리고 어느샌가 오가타 세이지까지 가세되어서 말이다.

 

 “후지사키, 한 판 두자.”

 

 아키라와 히카루가 바둑을 두는 사이 오가타는 키요시에게 대국을 신청했다. 본인은 알까 모르겠다. 마주보는 사람이 뜨거울 정도로 호승심 가득한 오가타의 눈동자에 키요시가 슬쩍 시선을 돌려 눈앞에 드리워진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거절은 없다.”

 

 떨이지는 키요시의 입술을 바라보며 오가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키요시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가타가 그제야 무서운 표정을 지우고 만족스런 태도로 돌을 갈랐다. 매번 대국을 거절하려 들지만, 그래도 후지사키 키요시가 매일같이 기원엘 나오는 것을 보면 마냥 싫은 건 아닐 거라고 오가타는 생각했다.

 

 “흠….”

 

 대국을 이어가던 오가타가 백기를 들었다. 당연한 결과처럼 패배를 선언하고 다시 복기를 시작했다.

 

 “대체 이 수를 어떻게 미리 알아챈 건지. 이렇게 두려고 했는데 말이야, 완전히 막혀버렸어.”

 

 어느새 대국을 끝내고 다가온 히카루와 아키라도 거들었다.

 

 “그러게요. 저라면 걸려들었을지도 몰라요.”

 

 “정말 좋은 수네요. 하지만, 후지사키는 그걸 알아채고 여기에… 수를 두었고 말이죠. 어떻게 알았을까? 음…. 물어봐도 되니?”

 

 셋은 고개를 맞대고 토론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키요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집중된 이목에 민망했는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볼을 긁적인다.

 

 “하긴, 과정이 없으니까 설명할 길이 없겠지?”

 

 그런 키요시의 모습에 히카루는 그가 부끄러운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키요시에게서 답이 없자 아키라는 기억에 의존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후지사키는 그냥 둔다고 했으니.”

 

 “감으로 두는 걸까?”

 

 “그렇지 않을까? 아니면 정말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는 걸 수도 있어.”

 

 두런두런 아키라와 히카루가 나란히 대화하다 재차 키요시에게 물었다.

 

 “어떤 거니?”

 

 키요시는 잠시 말이 없더니 뚱하니 대꾸하였다.

 

 “대충 알아서 생각해.”

 

 어딘가 해탈해보이는 음성이라 아키라도 히카루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계속되는 칭찬에 머쓱한 마음이 커진 모양이었다.

 

 

 

 

 처음이었다. 후지사키 키요시가 대국 중에 이렇게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기성전 세 번째 대국에서 신도우 히카루를 상대로 후지사키 키요시는 공식대국 중 처음으로 십수 분의 시간을 보내고, 다음 수를 두었다.

 

 물론 시간을 난생처음으로 오래 끌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더라도 놀랍기는 하였다.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빼도박도 못하고 둘 곳이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길게 고민하긴 하였으나 기어코 묘수를 찾아낸 것이니까.

 

 히카루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잠시 뒤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그런 히카루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힘들다….’

 

 무척이나 작게 중얼거린 거였지만 히카루는 똑똑히 들었다. 번쩍 고개를 들고 키요시에게 다가갔다. 역시 아픈 게 다 낫지 않았던 걸까? 하긴 행사 일정이 많이 줄기는 했어도 키요시는 많이 바빴다. 여전히 타이틀을 모두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는 곳도, 꼭 잠여해야하는 곳도 많았기 때문이다. 역시 그래서 두는 속도가 느렸던 거겠지.

 

 “괜찮아? 역시… 무리하지 마, 후지사키.”

 

 히카루가 보기에 창백한 얼굴을 쓸며 키요시는 손을 저었다.

 

 “됐어, 저리 가.”

 

 어딘가 상심한 듯도 보여서 히카루는 잠시 시무룩해졌다가 이내 밝게 외쳤다.

 

 “아, 감기가 옮을까봐 그래? 괜찮아! 나 지금까지 잔병치레 한 번 없었어!”

 

 그럼에도 키요시의 표정은 펴지질 않아서 히카루는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기원에서 기성전 대국을 복기하며 머리를 맞대고 있던 히카루와 아키라는 가만히 있다가 이마를 부여잡는 키요시에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왜? 또 머리가 아파?”

 

 “좀 쉴까?”

 

 호들갑을 떨며 우왕좌왕하는 둘을 두고서, 키요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히카루와 아키라는 멍하니 키요시를 보았다.

 

 “가야겠어.”

 

 어디를?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 걸까? 어딜 가냐며 되묻기는 하였으나 답을 듣지 못하고 둘은 키요시를 보내주어야했다. 그 표정이 어쩐지 급박해보였기에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키라가 중얼거렸으나 히카루는 답하지 못하였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뛰쳐나간 키요시가 걱정이 된 히카루와 아키라는 다음날 당장 키요시의 집을 찾았다.

 

 “어머, 저번에 봤던 키요시 친구들이구나. 키요시를 찾아왔니?”

 

 “네, 혹시 안에 있을까요?”

 

 “그럼. 컴퓨터를 하고 있는 거 같던걸.”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 반가워 어머니는 문을 활짝 열어 히카루와 아키라를 반겨주었다. 친구들이 찾아온 것이 쑥쓰러웠는지 어물쩡거리는 키요시에 어머니는 웃으며 다과를 내주었다.

 

 “또 먹고 싶으면 말하렴.”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두 아이에 어머니는 기쁘게 웃고는 방을 나갔다.

 

 “넷바둑을 두고 있던 거니?”

 

 아키라가 두리번거리며 방을 살피다가 키요시의 책상 위에 켜진 컴퓨터를 발견했다. 히카루는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방에 바둑판이 없네. 컴퓨터로만 두나봐.”

 

 그게 머쓱했는지 먹고 가라며 다과를 밀어주는 키요시의 모습에 히카루가 배시시 웃었다.

 

 “역시 상냥하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했지?”

 

 “맞아, 우리끼리만 대국하고.”

 

 아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키요시가 입술을 지르물며 고개를 숙였다. 히카루에게 잡힌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면서 그 손을 떼어내려하고 있었다. 삐쳐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다. 아키라는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는 다시 실컷 대국하자.”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아키라가 말했다. 히카루는 맞장구치며 키요시의 팔을 놓았다. 여전히 불퉁하게 괜스레 미간을 찡그리는, 조금쯤은 기분이 풀렸을 것이 분명한 키요시의 얼굴에 히카루 또한 웃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왜냐하면, 안색이 조금 환해진 것 같았으니까. 후지사키는 정말 티가 많이 난다니까. 히카루가 아키라와 함께 시시덕거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오가타는 당연스레 그들이 자주 모이곤 하는 기원을 찾았다.

 

 “후지사키.”

 

 이름을 부르자마자 녀석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거절의 말을 꺼냈다.

 

 “안 두면.”

 

 “안 돼.”

 

 오가타가 단호하게 키요시의 말을 잘랐다. 역시나, 대국하자고도 안 했는데 마주치자마자 대국하지 않겠노라 먼저 이야기하다니. 아키라의 말이 맞는 것이 틀림없다. 키요시를 맞은편에 앉히고 오가타는 바둑알을 갈랐다.

 

 키요시가 흑이었다. 오가타는 키요시가 두기를 기다리다 한참이 지나도 돌을 쥐지 않는 그의 모습에 톡톡 바둑알이 담긴 통을 가볍게 두드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후지사키.”

 

 나직하게 그 이름을 부르자 키요시는 머뭇거리며 재차 입을 떼었다.

 

 “역시 안 두면….”

 

 “안 돼.”

 

 다시 한 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꿋꿋한 눈빛으로 지그시 키요시를 바라보자 키요시는 입술을 꾹 다물며 조용히 돌그릇을 열었다.

 

 

 

 

 상대방에게 민감하던 예전에도 그러지 않던 키요시가 갑자기 바둑을 두기 싫어하는 것은… 역시 기풍 때문일까? 항상 위축되거나 겁에 질려하는 상대방의 반응 때문에? 수비까지 완벽해지니 빈틈이 더 없어지는 바람에, 그리고 커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키요시의 인상 덕분에 요즘들어 더 심해지기는 했다. 그 때문이라면….

 

 “팔짱이라도 끼고 두어보는 건 어때, 후지사키?”

 

 아키라가 고민하다 말했다. 히카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치만 가뜩이나 건방지다고 다들 오해하는데, 팔짱은 좀.”

 

 “하지만 그러면 두는 속도가 느려질 거고, 그러면 상대방이 위축되어 제대로 두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줄어들거야. 후지사키, 너는 그게 싫었던 거지?”

 

 잠시 생각하던 키요시가 미묘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해결되면 슬럼프는 자연히 사라지겠네?”

 

 히카루가 밝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리곤 곧 키요시에 대한 조언이 시작되었다.

 

 “절대 돌부터 먼저 들지 마. 알았지? 조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돌을 쥐는 거야.”

 

 “팔짱은… 그래, 그건 표정 때문에 더 무서워보일 수 있으니까 차라리 돌을 쥐는 손에 뭔가 들고 있자! 그럼 그거 때문에라도 돌 쥐는 속도가 느려질 거야.”

 

 키요시는 말없이 둘을 바라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걸로 해결이 될까 의심이 드는 모양이었지만 일단 해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키요시의 바둑 연습을 위해 아키라와 히카루가 기원에 모였다. 여느 때와 같아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가짐은 달랐다. 마냥 공부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연습해보자.”

 

 히카루의 말에 어느새 행차한 오가타 세이지가 털썩 키요시의 앞에 앉았다.

 

 “내가 상대하지.”

 

 “어, 오가타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갑자기 등장한 오가타 덕분에 놀란 히카루와 아키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의 물음에 오가타는 대충 대꾸해주고서 자연스럽게 돌그릇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얘기는 아키라한테서 들었다.”

 

 물 흐르듯이 돌을 가르고 흑돌을 가져가는 오가타의 모습에 키요시가 느릿하게 남은 백돌을 가져갔다.

 

 “느리게 두는 연습을 한다고?”

 

 따악 첫 수를 두고서 오가타는 빤히 키요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왜소하긴 하지만 이제 얼핏 덩치만 보면 성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얼굴 표정도 차가운 편이고, 상대가 위축이 될 만도 하지. 오가타가 고개를 주억이곤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뜨겁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뭔가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게슴츠레 키요시를 훑었으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의 키요시가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불퉁한 그 음성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아서 오가타는 괜스레 담뱃대를 꺼내물었다. 그러다 잘게 떨리는 제 손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리고 도로 담배를 집어넣었다. 그대로 담배를 피우다간 떨리는 손을 들킬 것 같았기에 그것을 숨기기 위해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톡톡 규칙적으로 팔뚝을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키요시의 부채를 골라주기 위해 본원의 부채가게로 들어간 아키라와 히카루는 이리저리 제 색깔에 맞는 부채를 골라들고는 씨름했다. 그걸 멀리서 지켜보던 키요시가 근처에 있는 부채하나를 대충 들고 점원에게서 내밀었다.

 

 “계산해주세요.”

 

 “어?”

 

 그제야 투닥이던 아키라와 히카루가 키요시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색의 부채가 벌써 키요시에게 간택되어 그 손에 들려있었던 것이다.

 

 “벌써 샀어?”

 

 “우리가 골라주려고 했는…데.”

 

 키요시에게 다가가던 둘은 멈칫했다. 키요시의 손에 펼쳐진 부채가 무척이나 사나운 인상의, 키요시와 아주아주 잘 어울리는 호랑이가 눈을 번뜩이며 둘을 보았기 때문이다.

 

 “음….”

 

 “어….”

 

 말을 잃은 둘을 보다가 부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키요시가 곧 부채를 접고 둘을 외면하였다.

 

 “후지사키, 이거는… 절대 펼치지 말자.”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줄 시간을 주려고 부채를 샀더니, 더 무서운 그림이 있는 것을 사고야 만 키요시에게 차마 거친 말은 하지 못하고 돌려서 의견을 피력하였다. 다행히 그 뜻을 알아챘는지 키요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아온 십단 타이틀전, 오가타 세이지와 후지사키 키요시는 각각 도전자와 방어자로서 또다시 맞붙게 되었다.

 

 오가타는 어젯밤에도 몇 번이고 키요시의 수를 분석하고, 그간의 대국들을 복기해보았지만 키요시를 백프로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하지 못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오늘의 상대, 키요시를 보았다.

 

 그래도 평소 두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근래들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주 두기는 했고, 그때마다 매번 지기는 했지만서도 공식적인 자리는 또 다르니까.

 

 오가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요시는 크게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힐끔 오가타를 보았다가 바닥으로 시선을 돌린 채였다.

 

 한숨? 팔짱을 껴? 이 녀석 봐라. 오가타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아키라가 팔짱 끼지 말라고 안 하던?”

 

 뭐, 예의 없다는 소문이나 대국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아주 널리널리 퍼지길 바란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물론 녀석이 그런 걸 신경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야 했다. 키요시는 오가타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답했다.

 

 “소름이 돋아서요.”

 

 아. 전에 감기에 걸리고는 했었지. 온도에 민감한 편이로군.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가싶어 오가타가 혀를 찼다.

 

 “그러게 따듯하게 입지 그랬냐.”

 

 바깥은 오늘따라 3월 치고는 찬 바람이 불었는데, 키요시의 옷 상태는 겉옷도 없이 상당히 얇게 차려입은 정장이 다였다. 오가타의 말을 잔소리라고 생각했는지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는 한숨을 삼키며 행사관계자를 찾아 손짓했다.

 

 “저 녀석한테 따듯한 차라도 좀 준비해주시죠. 추운 모양이니.”

 

 의외의 친절에 당황한 것처럼 키요시가 멈칫하고 오가타를 보았다.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여는 것이, 거절부터 하고 보는 녀석의 특성 상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는 것만 같아서 오가타가 시큰둥하게 말하였다.

 

 “또 감기라도 걸렸담봐라. 집까지 쫓아가서 대국하자고 한다.”

 

 키요시가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집까지 가서 저와 대국하는 것은 너무나도 싫다는 듯이 냅다 수긍하는 그 모습에 오가타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저랑 대국하기 싫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티를 낼 일인가.

 

 “화 좀 냈기로서니 너무한 거 아니냐.”

 

 그야 대국을 하고 난 후의 오가타는 자주 무서운 표정을 지었는데, 특히 대국에서 지고 나면 상당히 저기압이 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화난 표정을 짓게 되고 만다. 그런데 후지사키 키요시와 둘 때는 늘 지니까 어쩔 수가 없이 그것이 반복된 것이다. 오가타가 못마땅하게 이야기하였으나 키요시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자리로 향했다. 뒤에서 혀를 차는 오가타를 모른 척한 채로 말이다.

 

 

 

 

 부채를 꾹 쥐었다가 힘을 푸는 키요시의 모습은, 바둑알을 쥐기 무섭게 속공으로 돌진하던 전과는 많이 달랐다. 좀 더 차분해진 그 모습에 오가타는 그 속을 가늠하듯 키요시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그저 뚱하기만 했을 얼굴이 집중하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는 습관이 바뀐 후로 다른 이들은 상대하기 더 쉬워졌다고 하던데, 오가타는 되레 키요시가 무슨 생각인지 읽기 더 어려워졌다.

 

 너무 깊이 사색에 빠져있었던 탓일까.

 

 “아. 이런.”

 

 다음 수를 두기 위해 돌을 쥐었다가 저도 모르게 바둑판 끝에 걸쳐진 돌을 옷깃으로 쓸어버리고 말았다. 아주 살짝이지만 그래도 규칙은 규칙, 오가타가 허탈하게 반칙패의 판정을 받아들이는데 상대편의 키요시의 표정이 어마무시했다.

 

 반칙패를 당한 것은 오가타 자신인데, 왜 녀석의 표정이 저렇게 사나운지. 누가 보면 저가 반칙패를 당한 줄 알겠다. 덕분에 졌음에도 불구하고 황당하면 황당했지 화도 나질 않았다.

 

 “반칙패 당한 건 난데 왜 네 녀석이 그러냐.”

 

 대국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 대기실에서 복기하기 위해 모였을 때까지 키요시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가타는 어이가 없어서 너털한 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두지 못한 게 억울한가봐요.”

 

 아키라가 제법 그럴듯한 가설을 내뱉었다. 그게 틀린 것은 아닌지 키요시는 반박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참 나.”

 

 오가타가 코웃음 치는데 돌연 키요시의 시선이 오가타를 향했다.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길에 오가타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기분이 나빠져서 오가타는 미간을 찡그렸다.

 

 “불쌍하다는 듯이 보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안 그래도 슬슬 패한 것이 실감이 나서 기분이 나빠지려는 차였는데. 욕지거리를 삼키며 비틀리려는 입술을 애써 외면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다음 대국에서는 꼭….”

 

 꼭. 그 뒤를 잇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저번처럼 ‘이겨달라’는 거겠지. 아니면 제대로 두자는 얘기라던가. 오가타가 키요시를 흘겨보았다. 마주본 시선이 뜨거웠다. 이상한 녀석. 보통은 저가 이기겠다고 선언하지 않나? 오가타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꼭 이겨주세요.”

 

 저번에 못다한 말을 하듯이 대뜸 내뱉어진 인사 아닌 인사말에 오가타가 팍 인상을 찌푸렸다. 눈앞에 숙여진 키요시의 고개가 마치 ‘나 진심이오’하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더 불쾌했다. 오가타는 왠지 모를 갑갑함에 옷매무새를 고치며 짜증스레 말했다.

 

 “너는 그냥, 말을 하지 마.”

 

 상대편 대국 상대에게 꼭 이겨달라니, 이게 비꼬는 게 아니면 대체 뭐야? 정말로 진심이란 거냐. 속으로 꿍얼거리는데 키요시가 재차 입을 연다. 그 입에서 나올 말이 왠지 더욱 더 오가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릴 것만 같아서 잽싸게 손을 뻗어 키요시의 말을 제지했다.

 

 “말하지 마. 그래, 차라리 그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는 게 낫겠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저를 보는 키요시를, 오가타는 가늘게 눈을 떠 이리저리 살폈다. 표정하며 행동하는 태도 등을 말이다.

 

 “당초에 무슨 표정인지… 읽을 수가 없단 말이지.”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돈 거겠지만. 상대를 압박한다는 둥, 노려본다는 둥, 무시한다는 둥… 키요시를 둘러싼 소문은 꽤 많았고 대체로 질이 좋지 않았다. 그에 동참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아직도 아키라나 신도우 녀석 말을 완전히 믿진 않아.”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후지사키 키요시, 이 녀석이 착하다고? 말도 안 된다.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오가타가 코웃음을 치곤 키요시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럼, 시작해주세요.”

 

 뒤이어 제자리에 앉은 키요시를 확인하고 그 눈을 마주본 오가타는,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오가타가 안경너머로 한 사람의 모습을 담았다. 어딘가 공허해보이는 표정의, 후지사키 키요시였다. 문득 귓가에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스쳐지나간다.

 

 ‘그래도 라이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지. 바둑은 둘이서 두는 거니까. 대등한 사람이 있어야 만족스러운 대국을, 함께 그려나갈 수 있을 테니.’

 

 당시에는 그러려니하고 그냥 스쳐보냈던 말이다.

 

 ‘그렇다면 바둑의 신은 외롭겠네요.’

 

 신도우 히카루가 말했다. 당시에는 참 아이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다. 오가타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패배를 시인하는 일은 몇 번을 겪어도 순순히 승복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대등하게 둘 상대가 없잖아요.’

 

 아이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던 히카루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가타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멈추었던 숨을 고르며 입을 떼었다.

 

 “다음에는.”

 

 ‘기도했어요. 오가타 선생님이 이기게 해달라고요.’

 

 이제는 알 것 같은, 진심이었던 상대의 마음을.

 

 “꼭 이겨주마.”

 

 오가타는 이제야 받아들였다. 마주한 키요시의 눈이 살짝 크게 뜨인 것도 같다. 홀로 완벽한 존재라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지 그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가타가 애써 한 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꼭 이겨달라는 말 나중 가서 무르지 마라.”

 

 할 수만 있다면, 그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어졌다.

 

 

 

 

 신도우 히카루가 ‘sai’일 줄은 정말이지, 의심은 했었지만 말이다. 일전의 일을 떠올리며 괘씸한 마음에 아키라가 히카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거의 노려보는 것과도 같은 행태에 히카루가 움찔했다.

 

 “왜, 왜 그래. 나 진짜 ‘sai’ 아니라니까?”

 

 그러며 며칠 전의 의심을 아직도 지우지 않은 아키라에게 말했다. 아키라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물렸다.

 

 “…믿어줄게. 후지사키가 그렇게 노력했으니까.”

 

 “아…하하.”

 

 히카루는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울상을 지어야했다.

 

 ‘신도우, 대리계정은 영구정지라고. 네가 잘못한 거야.’

 

 그렇게 티나게 국어책 읽듯이 말하면 누가 모르겠냐. 차마 애먼 키요시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히카루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히카루의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뭐냐, 한숨이나 쉬고.”

 

 “아, 오가타 선생님.”

 

 오가타였다. 히카루가 흠칫하며 뒤돌아보자 오가타의 눈썹이 꿈틀했다.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에 오가타의 눈이 날카롭게 히카루를 훑었다.

 

 “그래. 뭐하냐? 바둑도 안 두고.”

 

 “그게….”

 

 히카루가 찔끔하여 그 시선을 피하고는 머뭇거리자 아키라가 대신하여 답했다.

 

 “후지사키 슬럼프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슬럼프?”

 

 그래, 저번에 말했었지. 오가타가 가만히 턱을 쓸며 되뇌었다. 슬럼프라…. 글쎄, 과연 그게 슬럼프라고 할 수 있을까.

 

 “슬럼프 때문이 아니야.”

 

 오가타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내뱉었다. 히카루와 아키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슬럼프 때문이 아니라고요?”

 

 그럼 뭐지? 고개를 갸울이는 둘에게 오가타는 입을 열었다.

 

 “대등하게 둘 상대가 없어서 그런 걸 거다.”

 

 라이벌로 인식할 만한 상대가 없으니까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냐, 그렇게 덧붙이려던 오가타의 입이 닫혔다. 그리곤 흘러가듯 자신의 결심을 읊조렸다.

 

 “걱정 마라. 이제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

 

 안경너머의 갈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회상하듯 허공에 덧그려졌다. 오가타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아키라와 히카루가 의아해할 새도 없이, 그것은 금세 이어진 오가타의 말에 의해 묻혔다.

 

 “그런데, 오늘 복기하기로 한 건 뭐냐.”

 

 “아. 어제 있었던 오가타 선생님과 후지사키의 대국을 복기해보려고 했어요.”

 

 아키라가 돌을 정리하며 답하였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오가타에게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졌습니다.”

 

 십단전 세 번째 대국. 그렇게 내뱉는 키요시의 음성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격양되어 있다. 키요시에게는 제대로된 첫 패배인 것이다. 잘게 떨리는 몸, 가쁜 호흡, 붉어진 눈시울. 지금 후지사키 키요시의 모습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가 당황했다.

 

 “그….”

 

 무어라고 해야할지. 항상 ‘이겨달라’고 했던 상대를 이겨주었는데 보인 반응이 이렇다면, 오가타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일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도 그런 상대는 없었으니까.

 

 키요시는 가만히 굳어있지 않았다. 복기를 하려는 듯 빠르게 돌을 주워담고 재차 돌을 쥐는 그의 모습에 오가타가 행동을 멈추었다. 보기 드물게 적극적인 태도인데다가….

 

 웃고 있었다. 울음기가 가득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반짝거리는 눈 하며 입가에 옅에 띤 미소하며 키요시의 얼굴엔 패배자의 우울감이라고는 한 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너는 그렇게….”

 

 오가타가 저도 모르게 입을 떼었다가 닫았다. 진 게 그렇게 신나는 거냐.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한 표정으로 키요시를 바라보던 오가타는 이내 꿋꿋이 키요시의 손에 별쳐지는 바둑판의 광경에 헛웃음을 들이켰다.

 

 “네 녀석은 정말이지, 못 따라가겠군.”

 

 벌써 파훼법을 발견한 거다. 키요시 본인이 당했던 결정적 순간에, 또 다르게 놓인 돌의 모양에 오가타가 못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됐다. 그렇게 뒀다면 네가 이겼겠지.”

 

 반짝반짝한 키요시의 시선에 오가타가 미묘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어필 안 해도 알겠으니까.”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찌되었든 한 번이긴 했지만 자신과 대등하게 둔 상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니까 들뜬 것도 당연하겠지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번은 이기긴 했지만, 보아하니 다음 번 승부도 장담하진 못하겠다.”

 

 그렇게 순식간에 성장해버리니. 오가타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대국실을 나섰다. 뒤에서 멈칫하고 저를 바라보는 키요시가 느껴졌으나 오가타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보아줄 수가 없었다.

 

 

 

 

 4월이 지나고, 혼인보전이 있는 여름즈음엔 키요시의 생일이 있었다. 아키라와 히카루는 친구 키요시의 생일 선물로 무엇을 주어야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직접 물어보기로 한 둘은 상상치도 못했던 대답에 벙쪘다.

 

 “선물은 필요없어. 대신, 타이틀전에서 나를 빨리 이겨줘.”

 

 아키라와 히카루가 웃었다.

 

 “욕심이 없구나, 후지사키.”

 

 자신의 것이라기엔 애매한 선물을, 그것도 형태도 없는 것을 바라다니. 심지어 그 바람도 키요시다웠다. 키요시는 웃는 둘에게 불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웃지 마.”

 

 자칫 화가 나 보일 수 있는 표정이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둘이기에 재차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오가타 선생님한테 들은 게 있으니까.”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우리가 빨리 너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대등한 실력이 되면 좋겠다는 거지?”

 

 아키라와 히카루는 일전에 오가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등하게 둘 상대가 없어서 그런 걸 거다.’

 

 그리고 키요시가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타이틀전에서 나를 빨리 이겨줘.’

 

 바라는 바는 명백했다. 안타깝지만 순수한 그 마음에 아키라와 히카루가 속으로 동시에 기도했다. 꼭, 언젠가는 후지사키 키요시와 대등한 대국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던 바였는지, 그러나 쑥쓰러웠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키요시의 모습에 둘은 씩 웃었다.

 

 “알았어. 내일 오가타 선생님과의 대국, 기대할게.”

 

 오가타 선생님이 더는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고 하셨으니 분명 후지사키도 만족스러운 대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은 그렇게 생각하고 토닥토닥 키요시의 어깨를 다독였다.

 

 

 

 

 십단전 제 4국이 치러는 당일. 오늘 패배한다면 자신은 도전자로서의 대국을 마무리 짓게 되겠지. 오가타는 조금 이르게 대국실에 도착해서 뒤늦게야 시간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조금 기대가 되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키요시도 마찬가지였는지 제법 이른 시각임에도 둘은 정면으로 맞딱뜨렸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불타는 눈으로 저를 보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가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는 말은 저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아차 실수다. 오가타가 식은땀을 흘렸다. 녀석이라면 바로 실수를 알아채고 공격해오겠지. 오가타가 예상한 것과 같이 곧장 치고들어오는 키요시의 한 수에 결국….

 

 “졌습니다.”

 

 패배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러자마자 키요시는 한쪽 돌을 바라보며 가만히,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오가타가 실수했던 부분이다. 그래. 이 수가 패착이었지. 오가타는 자신이 실수했던 수를 바라보며 괜스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래도 한 번쯤은 제대로 이야기해야할 것 같아 한숨처럼 내뱉었다.

 

 “만족스러운 대국을 두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키요시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오가타를 바라보았다. 오가타는 그 속내를 가늠하기 위해 빤하게 키요시의 표정과 두 눈을 살피다가 입을 떼었다.

 

 “다음 기전인 혼인보전은 이치류 선생님이시니, 미리 준비하는 것도 좋겠지.”

 

 그리곤 아무리 너라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며 이야기하다가, 그게 쓸 데 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도 압도적으로 이긴 적 있는 상대다. 더군다나 키요시라면, 아무리 전 기성인 이치류가 상대라도 별로 질 것 같지가 않았다. 가라앉은 키요시의 기분을 환기시켜주기 위해 무어라 말해야할까 고민하던 오가타의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안 먹을래요.”

 

 자신과의 저녁을 거절하는 키요시의 대답이었다. 시무룩해보이는 그 음성에 오가타는 조금 미안해졌다. 기대했을 텐데, 자신이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버려선. 오가타가 혀를 찰 뻔한 것을 삼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라.”

 

 얼른 사라져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까. 그렇게 생각한 오가타의 걸음이 막 옮겨질 때였다.

 

 “…메뉴가 뭔데요.”

 

 불퉁한 키요시의 음성이 오가타의 귓가에 들어온다. 뭐야, 안 먹는다며? 오가타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후지사키는 먹을 걸 은근히….’

 

 “초밥을….”

 

 언젠가 흘러가듯 들었던 아키라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는 건 왜일까. 오가타는 반사적으로 답하며 생각했다. 이 녀석, 진짜 먹을 걸 좋아하나?

 

 “참 나.”

 

 제 말에 벌떡 일어나선 제 곁으로 다가오는 키요시의 행동에 오가타가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였냐.

 

 

 

 

 아키라와 히카루는 간만에 키요시의 집에 들렀다. 다름아닌 생일선물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대뜸 선물만 주기 민망해서 안부 차 근황을 물었다.

 

 “후지사키 너는 왜 북두배에 안 나가니?”

 

 “내가 거길 왜 가.”

 

 뚱하니 답하는 투는 익숙했지만, 내포된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아키라가 쓰게 웃었다.

 

 “하긴, 타이틀전 때문에 바쁘지.”

 

 또래와의 대국은 대체로 무자비하게 이겨버리고 마니까, 그게 신경쓰이는 거겠지. 그래도….

 

 “신인사자전이라도 나가면 좋을 텐데.”

 

 그나마 북두배나 신인사자전이 키요시가 비슷한 연배의 아이들과 둘 수 있는 기회일 테다. 그런데 그런 곳에 일절 나가지 않는다니, 애타고 있을 키요시의 속마음이 훤하여 아키라도 히카루도 씁쓸한 표정을 했다.

 

 “자라나는 새싹을 밟을 수는 없다는 거겠지.”

 

 순식간에 말을 잃은 두 사람은 잠시만 키요시의 눈치를 살피다가 챙겨온 선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참, 생일 선물이야.”

 

 “맞아, 나랑 도우야랑 같이 준비했어. 저번에 보니까 네 방에 바둑판이 없길래.”

 

 키요시의 얼굴에 드물게 당황하는 표정이 스쳤다.

 

 “이건 너무….”

 

 비싼 것 아니냐고 할 것 같은 뒷말에 냅다 아키라와 히카루가 말을 끊어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

 

 “그래, 같이 두자고 선물하는 거니까!”

 

 미안해하지 말라며 손사레를 친 히카루의 시야에 입술을 꾹 지르물고 저희들을 바라보는 키요시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어떠한 마음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어떤 감정일까? 그게 무엇이든 나쁜 감정은 아닌 것 같아서 히카루와 아키라는 머리를 맞대고 키득거렸다.

 

 “좋아하는 거 같지?”

 

 “응. 기쁜가봐.”

 

 본인들 생일은 언제냐고 묻는 키요시에게 둘은 웃으며 말했다. 키요시에게 생일선물을 받는다면 둘은 좋았다.

 

 “우리는 네가 대국만 해주면 좋겠는데.”

 

 “그런….”

 

 다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런 걸로 되겠냐는 듯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도 히카루도 마냥 웃기만 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싶던 키요시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좋…….”

 

 좋다는 둥, 무어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게 자신들과 두는 것이 좋다는 말 같아서 둘은 제대로 듣지 못한 그 말의 내용을 제멋대로 넘겨짚어 받아들였다. 다음 생일에는 키요시와 실컷 대국할 수 있겠구나! 기쁜 일이었다.

 

 

 

 

 “잘 부탁한다, 얘야.”

 

 혼인보전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린 기사라지만 상대는 많은 타이틀을 거느린 초신성의, 최정상에 올라선 프로였다. 프로가 된 햇수가 적어 아직 단수는 낮지만 웬만한 타이틀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함부로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이 말이다. 그러나 이치류는 뻣뻣한 키요시의 태도에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

 

 “인사를 했으면 받아줘야지, 예의하고는.”

 

 쯧 혀를 차며 괘씸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치류를 키요시가 힐끔 보았다가 차갑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올리는 모습은 언뜻 보아도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이치류가 이를 갈았다. 어린 놈이…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까득 소리가 나면서 이치류의 손에서 부채가 뭉그러졌다.

 

 그리고 대국이 진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졌습니다.”

 

 이치류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봉수까지 채 가지도 못한 채 지고 만 것이다. 대국실 안이 잠시 술렁였다. 후, 짧게 뱉어진 키요시의 한숨이 얼핏 비웃음과도 같다. 대국실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자 조용해진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후지사키 키요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런 키요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치류는 부채가 부러져라 손에 힘을 주었다. 저런 어린 꼬맹이에게 지다니. 분노로 인해 치가 떨렸으나 이미 패배한 이치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혼인보전을 연승 중인 키요시에게 아키라가 물었다.

 

 “후지사키, 어때?”

 

 키요시는 말없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키라를 보았다. 무엇이 어떠냐는 물음 같아서 조금 전 했던 말을 요약하여 설명했다.

 

 “북두배가 끝나면 고영하와 홍수영이 일본 본원을 구경시켜달라고 했어. 그때 시간 괜찮은가해서. 너를 보고 싶다고 하더라. 음… 역시 혼인보전 4국 전날이라 부담스러울까?”

 

 입가를 쓸며 고민에 빠진 키요시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키라가 조마조마하게 그 답변을 기다렸다.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모습에 아키라가 반색하며 재차 물었다.

 

 “정말? 괜찮아?”

 

 두 눈을 마주해오는 키요시의 눈동자에 아키라는 그것이 수락이리라 생각했다.

 

 “홍수영이 좋아하겠다. 너와 다시 대국하고 싶다고 했는데. 물론 신도우와도 두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그래, 맞아. 후지사키 너와는 그때 멋대로 돌을 던진 것 말곤 제대로 둔 건 딱 한 번 밖에 없었다며? 홍수영이 엄청 분해했는데.”

 

 히카루가 아키라의 말을 거들었다. 키요시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알아. 네가 먼저 ‘1패를 한다고 생각하고 두라’고 했잖아.”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아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히카루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두기는 했지만 다시 두겠다고 엄청 벼르고 있더라. 그 후에 행사에서 한 번 큰 차이로 졌잖아.”

 

 전에 있었던 사실을 이야기하자 키요시는 입술을 꾹 다물며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아키라와 히카루는 전에 있었던 대국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서로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키요시에게 ‘네 기풍에도 굴하지 않고 너와 함께 두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그것은 어느정도 성공한 것 같았으니까. 홍수영과의 만남을 거절하지 않는 것만 해도 증명이 되었다.

 

 

 

 

 홍수영이 본원에 도착한 당일, 키요시를 만나자마자 홍수영은 눈에 불을 켜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기고 싶다. 대국하고 싶다. 그 속마음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을 키요시도 눈치챘을까? 힐끔 저들의 눈치를 보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와 히카루가 웃었다. 그것이 대국하고 싶어서인줄 알았는데….

 

 “너와 다시, 제대로 두고 싶다! 이번엔 이기겠어!”

 

 홍수영의 말을 키요시가 날카롭게 잘라냈다.

 

 “싫어.”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키라도 히카루도 의외의 표정을 지으며 키요시를 보았다. 왜? 의문을 가졌던 둘은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혹시 내일부터 있는 네 번째 혼인보전 때문인가? 그럴 수 있겠다. 컨디션 조절을 해야하니까. 마지막 대국이기도 하고. 아키라는 당연히 키요시가 이길 것으로 생각해 이번이 마지막 혼인보전이 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와 두는 건 어때.”

 

 한국말로 누군가 이야기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영하 형!”

 

 그 말을 꺼낸 사람은 바로 고영하였다. 홍수영이 놀라서 그를 불렀으나 그는 단호했다.

 

 “통역해줘.”

 

 “형, 그치만.”

 

 “어서, ‘나랑 두자’고 통역해.”

 

 머뭇거리는 홍수영에게 고영하는 단호히 말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키요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지못해 홍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지사키 키요시. 영하 형이 너랑 대국하고 싶대.”

 

 그 말에 후지사키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 모습에 홍수영은 의아했으나 곧 이어진 아키라의 설명에 의해 납득할 수 있었다.

 

 “후지사키는 내일부터 이틀간 대국이 있어. 이따 저녁에 전야제도 가야하는걸.”

 

 변명처럼 들렸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점에서 더 대국을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청일 수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홍수영은 입을 비죽였다. 칫,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꺾어주려고 했는데. 무슨 다른 방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홍수영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넷바둑은 하지? 나중에 아이디라도 알려줘. 인터넷으로라도 대국하자.”

 

 “아, 그거 내가 알려줄게. 후지사키 아이디는 ‘sad’야.”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홍수영과 히카루의 모습에 키요시가 표정을 굳히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차가운 그 시선에 멈칫한 홍수영과는 달리 히카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래, 후지사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싶어서 히카루가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팩하니 고개를 돌리는 키요시의 모습에 히카루가 고개를 갸울였다. 엄청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전에는 대국 생각에 흥분해서 몰랐으나, 이제와 날카로운 키요시의 눈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니 조금 싸늘하기까지 해서 홍수영은 팔을 쓸며 중얼거렸다.

 

 “너네는 저 눈이 안 무서워…?”

 

 작아진 그 목소리에 히카루가 의아한 표정으로 홍수영을 보았다. 그 말을 유일하게 들은 것 같은 키요시가 빤하게 홍수영을 내려다본다. 그 눈빛이 조금 껄끄러워 홍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자 키요시가 혀를 차고 걸음을 떼었다.

 

 “난 간다.”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불쾌감이 서려있어서 홍수영은 자신이 굳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자신이 긴장했다는 것을 알아챈 홍수영이 그런 자신을 격하게 부정했다. 쫄았다고? 아니야. 그냥 녀석의 기분이 안 좋아보이니까, 그냥… 그냥 조금 신경쓰였을 뿐이야. 속으로 되뇌는 홍수영의 어깨를 고영하가 가볍게 건드렸다.

 

 “우리도 가자.”

 

 “아, 응. 영하 형.”

 

 고영하의 행동에 홍수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후지사키 키요시는 이번 혼인보타이틀기전에서도 완벽한 방어에 성공하였다. 사람들은 그 실력을 칭송하였으나, 태도까지 칭찬하지는 못하였다. 혼인보전이 끝난 뒤 인터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모두를 무시한 채 홀로 귀가하였기 때문이다.

 

 “바둑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린 나이에 계속해서 6관왕을 유지하게 된 소감은요?”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바둑에 임하실 생각입니까?”

 

 계속된 질문에도 키요시는 답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바둑을 두지 않을 때는 무얼하고 지내시죠?”

 

 사생활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기자들은 아차싶었다. 키요시의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그 입술 사이로 긴 숨이 들이켜졌다. 폭풍전야와 같이 조용해진 그 사이, 키요시는 한층 더 차가워진 얼굴로 자리를 뜬 것이었다.

 

 그 후 더는 키요시에게 사적인 질문을 날리는 이는 없었다. 그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아키라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후지사키는, 버거운 걸까?”

 

 “버겁다구?”

 

 히카루가 이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타이틀전 대국이 끝나면 매번 피곤해보였잖아. 아직 성인도 아닌데 6관왕이라는 게, 부담스러운 건 아닐까 해서.”

 

 그렇게말하다 입을 닫았다. 역시 후지사키를 너무 과소평가한 거겠지? 아키라는 그것이 자신의 기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고민에 빠진 아키라의 모습에 히카루가 ‘오가타 선생님이 라이벌로 인식할 만한 상대가 없으니까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하지 않았느냐’며 아키라의 걱정을 다독여주었다. 그리곤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별 거 아닐 거야. 먹고 싶은 거라도 생긴 게 아닐까? 후지사키는 먹을 걸 은근히 좋아하니까.”

 

 히카루의 말에 아키라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웃었다. 하긴. 바둑에 관해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자주 지었지만, 음식에 관해서는 호불호가 너무나도 명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친구 후지사키 키요시는 말이다.

 

 “맞아. 후지사키는….”

 

 히카루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아키라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지워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함께’ 둘 수 있을지 모른다는 듯이 두려워하던, 어렸던 날의 후지사키 키요시의 모습이 아키라의 뇌리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난 무서워.’

 

 아직도 아키라는 그날의 키요시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라 속으로 삭히고만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기껏 대등하게 두었다고 생각했던 오가타 선생님마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희망을 보았던 이가 다시 좌절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있을까? 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키요시에게 알게 모르게 ‘강함’을 요구하고 있으니까 그것 또한 겹쳐서 부담이 되었을 테고 말이다.

 

 아키라는 키요시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혼인보전이 키요시의 방어성공으로 끝이 나고, 키요시의 집에 초대를 받은 아키라와 히카루는 화색을 띠며 수락하였다. 마침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키요시였기에 아키라는 고영하, 홍수영과 넷바둑을 두는 것은 어떠냐고 제의하였고 다행히 홍수영의 시간이 비어 그와 인터넷으로 대국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셋 중 누가 홍수영과 둘 것인가였다.

 

 “…뭐야.”

 

 아키라와 히카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키요시에게 쏠렸다. 이로써 과반수의 동의로 인해 홍수영과 대국하게 된 키요시는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책상 앞에 앉았다. 한 판, 그리고 두 판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세 판째부터였다.

 

 “됐어. 끝. 끝이야. 도우야, 네가 둬.”

 

 계속해서 걸어오는 대국요청에 질린 키요시가 짜증스럽게 마우스를 밀어냈다. 아키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홍수영이 다시 두자고 청해왔어.”

 

 와락 찌푸려진 키요시의 미간에 히카루도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걔는 자기가 이길 때까지 하자고 할 거 같은데.”

 

 동감이었다. 아키라는 말없이 다시 키요시에게 딱 한 번만 더 두지 않겠냐는 듯이 눈짓했다가 거절당했다.

 

 “오늘은 그냥 게임할래.”

 

 키요시가 꺼내든 게임CD를 보고 히카루가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정말로 아는 것이었다. 히카루는 게임을 좋아했으니까. 신이 난 히카루가 키요시에게 이 게임이 어떻고 저 게임이 어떻고 이야기하는 동안 지그시 키요시를 바라보던 아키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지사키. 너는 바둑을 어떻게 생각하니?”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하지만 키요시는 무시하지 않고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히카루에게 답을 가로채였다.

 

 “당연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뭘 물어보는 거야?”

 

 그 말에 아키라가 머쓱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게. 자신은 키요시에게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 걸까.

 

 “아니, 그냥 가끔 보면….”

 

 아키라가 어물쩡거리며 말을 이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게 답답했는지 히카루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그거야? 부담스러운 거 같다고?”

 

 키요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것을 캐치한 아키라와는 달리 히카루는 그것을 모른 채 대꾸하였다.

 

 “후지사키도 한 고집 하잖아. 타이틀은…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진짜로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우리랑 어울릴 리가 있겠어?”

 

 맞는 말이었다. 아키라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나 아키라의 시선은 여전히 키요시를 주시하고 있었다. 키요시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아키라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새삼스럽게. 마음대로 생각해.”

 

 인상을 쓰며 머릴 헤집는 그 모습이 어떻게 보면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아서 히카루는 배시시 웃었다. 아키라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겐조는 오래간만에 손주와 두는 바둑이 설레기는 하였으나 그것보다는 손주의 기색을 살피기에 바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손주의 모습을 보는 것이 참 보기 좋았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으나 자그마한 걱정은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잘 지내고 있는 것인지, 바둑은 재밌게 잘 두고 있는 것인지, 지금 함께하는 친구들과 문제는 없는지…. 쓸 데 없는 걱정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겐조에게 키요시는 하나뿐인 손주였기에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요즘 어떻니, 키요시?”

 

 손주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말이 빠른 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겐조는 손주의 입이 열리길 기다려주었다. 성격이 급해서 오래 기다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천천히 입을 열려는 키요시에게 겐조가 말했다.

 

 “괜한 질문이라면 답 안 해도 된단다.”

 

 입을 뻐끔거리던 키요시가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란, 거의 대부분 할아버지인 겐조가 말하고 손주인 키요시가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것만도 사춘기는 훨씬 지났을 터인데 저를 밀어내지 않는 키요시가 겐조는 대견했다.

 

 

 

 

 다음 수를 두지 않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가 돌을 쥐고 바둑판이 가볍게 두드렸다. 톡톡, 그 소리에 키요시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 하냐, 대국 중에. 내일 있을 명인전을 생각하는 거냐?”

 

 그렇게 묻던 오가타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못마땅한 어투로 팔짱을 끼며 안경너머로 날카롭게 키요시를 응시했다.

 

 “아니면… 어디에 둬야 나를 엿먹일 수 있는지 생각하는 건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가 혀를 찼다. 그 모습에 아키라가 웃긴 표정으로 말했다.

 

 “오가타 선생님을 상대로 그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후지사키.”

 

 히카루가 맞장구쳤다.

 

 “맞아. ‘sai’도 그러지는 못했을….”

 

 아, 말실수 했다. 아차하며 히카루가 말을 멈추었다. 오가타와 아키라의 시선이 일제히 히카루를 향했다. 오가타의 눈이 더욱 무서워졌다.

 

 “신도우 히카루, 역시 네가 ‘sai’와 관련이 있었군.”

 

 그 모습에 무엇을 눈치챘는지 키요시가 갑자기 큰 소리로 국어책을 읽었다.

 

 “‘sai’와는, 계정을 공유하는 사이였지? 그치, 신도우!”

 

 필사적인 것은 좋았지만…. 오가타의 눈이 황당으로 물들었다. 숨기려고 하는 건가? 설마 진심으로 숨겨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힐끔 아키라를 보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오가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사이 급격히 우울해진 히카루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음료수라도 가져올게요.”

 

 키요시가 회피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히카루는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차마 너무 우울해보인지라 붙잡지 못하고 오가타와 아키라는 히카루를 그대로 보내주었다.

 

 “후지사키, 너는 알고 있었나? ‘sai’가 신도우와 아는 사이라는 걸.”

 

 오렌지주스와 녹차를 손에 들고 돌아온 키요시에게 오가타가 물었다. 키요시의 입이 꾹 다물렸다. 히카루가 먼저 얘기하기 전까지는 그 고집 상 추궁해봤자 어림도 없어보였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답은 되었다.

 

 “그래, 알고 있었군.”

 

 괘씸한 마음에 오가타가 키요시를 흘겼다. 그 시선을 그대로 받은 키요시가 눈을 내리감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들고온 음료수 중, 녹차를 아키라의 앞에 두고 오렌지주스를 제 앞에 내려놓는다. 그것을 지켜보던 오가타가 물었다.

 

 “…내 거는?”

 

 키요시가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오가타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요 녀석….

 

 

 

 

 어느덧 명인전의 세 번째 대국 이틑날. 얼핏보면 막상막하의 대결은 사실 이미 승기가 결정되어있다는 것을 히카루는 알았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꼭 이겨.’

 

 일전에 기성전에서도 그렇고,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키요시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기대감에 찬 눈동자도….

 

 “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나와있었다. 히카루가 참담한 마음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시야에는 침울한 표정의 키요시가 있었다.

 

 “다음엔 꼭 이기겠다며.”

 

 작게 중얼거리는 키요시의 음성에 히카루가 씁쓸한 얼굴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들어 돌을 정리하였다.

 

 “미안. 역시…….”

 

 안 될 거 같아. 자조적으로 되뇌려는데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아챈 것처럼 키요시가 단칼에 말을 잘라냈다.

 

 “아니야. 이길 수 있어.”

 

 그 말에 히카루는 저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던 고개를 들어 두 눈을 크게 뜨고 키요시를 바라보았다.

 

 “나와 비겼던 도우야마저 꺾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잖아.”

 

 그래. 맞다. 믿기지는 않지만, 늘상 지던 대국도 이기고 명인전 도전자로서 올라온 것이다. 마주한 키요시의 까만 눈동자에서, 실망이 아닌 믿음이 보여서 히카루는 울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숙인 히카루에게 키요시가 말했다.

 

 “잃어버렸던 걸 찾은 것처럼, 이번에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결국 히카루는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잘 부탁해.”

 

 반짝이는 키요시의 눈동자에 아키라가 옅게 웃었다. 왕좌전의 첫 번째 대국. 아키라는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아키라는 키요시의 상대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흑돌을 쥐고 아키라는 거침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두었다. 이번엔 예감이 좋았기 때문에 아키라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키요시가 입을 떼기 전까지는 말이다.

 

 “졌습니다.”

 

 얼마나 두었을까. 아직 대마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역전이 가능해보이는 상황에서 키요시의 고개가 숙여졌다. 물론 어려워보이기는 했다. 자신이 봐도 조금 전 아키라 본인의 수는 제법 묘수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요시가 고개를 숙일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당황한 아키라가 정식 대국중이라는 것도 잊고 키요시를 붙잡았다.

 

 “잠깐, 후지사키. 왜…?”

 

 어째서, 왜 그만 두는 거야? 뒷말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다음 수를 둘 수가 없었으니까.”

 

 키요시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에 아키라는 혼란스러웠다. 진심으로 졌다면 저번 오가타 선생님과의 대국에서처럼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키요시가 희미하게 웃었다.

 

 “만족스러웠어.”

 

 그러며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지는 키요시를 아키라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잘못 보지 않았다면, 뒤도는 순간 키요시의 얼굴에 보였던 것은 ‘아쉬움’이었다.

 

 그 아쉬움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키라는 마지막 왕좌전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덧 네 번째, 그러니까 아키라가 지면 방어전 성공으로 끝이 날 마지막 대국에서 아키라는 아쉽게도 지고 말았다. 아쉽게도? 아니, 사실은 너무 뻔하게 지고 만 것이다.

 

 “미안.”

 

 고개를 돌린 키요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사과해야할 것 같아서 아키라는 불편한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키요시가 그 손길을 쳐내며 불퉁하게 대꾸하였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 음성이 어쩐지 가라앉아보여서, 아키라는 더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체념일까? 역시 동등한 상대와 두지 못하여 힘든 것이 틀림없다. 아키라가 쓰게 웃었다.

 

 키요시는 그날, 늘 나오던 기원에 나오지 않았다.

 

 “이번 기성전에서, 기대하라고 해.”

 

 사건의 전말을 들은 오가타가 낮게 읊조렸다. 아키라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에 아랑곳않고 오가타는 짓씹듯이 말하였다.

 

 “제대로 이겨주겠다고 말이야.”

 

 그래, 녀석이 원하는대로 말이지. 오가타는 짓이겨진 담배를 버리고 새로운 담뱃가지에 불을 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보마.”

 

 기성전까지는 이제 한달이었다.

 

 

 

 

 대국하다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키요시의 모습을 아키라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피곤하니? 하긴 요즘 무리했지. 타이틀전 세 개를 병행했으니까.”

 

 명인, 천원, 왕좌까지 세 개의 타이틀기전을 방어에 성공하였으니 피곤할만 했다. 저번에 키요시가 감기에 걸렸던 것을 기억해내며 아키라는 따듯한 담요를 어깨에 둘러주었다. 키요시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키라는 그것을 무시했다.

 

 “옷도 얇게 입었네. 춥겠다.”

 

 분명 필요 없다는 둥의 쓸 데 없는 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입을 여는 키요시의 말을 잘라먹은 것은 히카루도 마찬가지였다. 히카루는 자신 근처에 있던 난로를 키요시쪽으로 밀었다.

 

 “필요 없어. 너네나 챙겨.”

 

 투덜거리는 키요시 특유의 말씨가 두 사람의 귓가에 들려왔다. 역시.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 배려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불어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다니. 둘은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자신들이 키요시를 챙겨야겠다.

 

 “얼굴색이 안 좋잖아.”

 

 “온도에 민감하구나, 후지사키는.”

 

 히카루와 아키라가 다짐하는 사이, 작게 기침하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따듯한 차를 더 내올게.”

 

 멈칫하고 키요시가 아키라를 붙잡으려 했으나 히카루가 그런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후지사키. 도우야가 차를 가져올 때까지 조금만 쉴까?”

 

 묵묵히 있던 키요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이 왠지 지쳐보여서 히카루는 제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며 키요시가 편히 쉴 수 있게 잠시 바둑판을 옆으로 치워주었다. 키요시의 눈이 멍하니 바둑판을 향했지만 그것을 무시한 채 말이다.

 

 

 

 

 히카루와 아키라, 그리고 키요시는 기원 말고도 번갈아가며 각자의 집에서 만나고는 했다. 이번에는 키요시의 집에서 넷바둑을 두기로 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드디어 고영하의 시간이 키요시의 스케줄과 맞아떨어져서 넷바둑을 둘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둘의 대국을 보며 히카루와 아키라는 저가 두는 것도 아닌데 마른침을 삼켜야했다. 둘의 기싸움이 아주 팽팽했기 때문이다.

 

 언제쯤 자신들은 키요시와 동등하게 둘 수 있게 될까? 아키라는 저번에 키요시에게서 한 번 승리를 얻어낸 바 있으나 그것이 제대로 된 승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제 중반부를 향해 치닫고 있는 고영하와 키요시의 대국이 부러웠다. 그러나 승패의 순간은 언제나 오는 법. 승리의 추가 어느덧 한 쪽으로 기우려는 순간이었다.

 

 팟, 소리를 내며 컴퓨터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셋은 당황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키라 자신이 낸 소리였을까? 아니면 히카루나 키요시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을까? 알 수는 없으나 셋 모두 한 마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야.”

 

 컴퓨터의 전원이 나가면서 기껏 두고 있던 대국이 중간에 끊기고 만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판단한 아키라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키요시를 돌아보았다. 히카루 또한 안타깝기 그지 없는 표정으로 키요시의 등을 토닥였다. 애써 위로하는 히카루의 말에도 키요시는 푹 수그린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것이 상당히 낙심한 듯보여서, 아키라와 히카루는 말없이 키요시를 위로할 뿐이었다.

 

 

 

 

 첫눈이 내린 1월, 새해의 첫 번째 타이틀기전 ‘기성전’의 막이 올랐다.

 

 “내일이 기성전 첫 대국인데, 기분이 어때?”

 

 아키라가 조심스럽게 키요시에게 물었다. 키요시는 무어 새삼스러운 것을 묻냐는 듯 묘한 표정으로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아키라는 일전에 오가타 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전에 오가타 선생님이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

 

 이 말을 언제 전해야할까 고민했는데, 지금이 적당하지 않을까싶다. 아키라가 고민하던 것을 관두고 키요시를 마주보았다.

 

 “이번 기성전에서 제대로 이겨주겠다고, 기대하라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들었던 날, 아키라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더라. 자신도 당당히 그런 말을 키요시에게 전해주고 싶다? 어찌되었든 떨리는 마음으로 아키라가 그 말을 전하였다. 아키라는 어쩌면 오가타 선생님의 기분이 이러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보았다. 후지사키 키요시와 동등하게 두고 싶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주고 싶다.

 

 아키라의 말에 두 눈을 깜빡이며 키요시가 되물었다.

 

 “제대로?”

 

 조금 설레보이는 키요시의 표정에 아키라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요시가 어느새 풀어진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뵙게되면….”

 

 그리고는 말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 음성은.

 

 “정말, 기대하겠다고 전해줘.”

 

 조금쯤 떨리고 있었노라고 아키라는 확신하였다.

 

 

 

 

 기성전 첫 번째 대국. 오가타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의 기분을 짐작케 했다. 평소라면 말을 걸어올 사람들이 오가타의 근처엔 얼씬도 않는 것을 보면 더더욱 짐작이 되었다.

 

 “안녕.”

 

 여느 때보다도 예민해보이는 오가타가, 자신의 대국 상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키요시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오가타는 그 짧은 인사를 끝으로 입을 닫았다. 그 상대, 키요시도 마찬가지로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만을 나눈 채 입을 꾹 닫은 채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싸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기성전 제 1국은 쉽사리 끝을 보이지 않았다. 첫째날은 물론이요, 둘째날도 그러했다. 확연히 느리던 진도 탓만은 아니었다.

 

 오가타 세이지, 후지사키 키요시 두 사람의 실력 차가 거의 없이 비등비등했기 때문이다.

 

 백 수가 넘는 수가 오가고 잠시 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돌을 내려놓고 꽉 주먹을 쥐었다폈다.

 

 “졌습니다.”

 

 푹 숙여진 고개가, 크게 들이켜진 숨이 그 심경을 대변하였다. 후지사키 키요시, 그의 제대로 된 두 번째 패배였다. 키요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한참을 가만히 있는 그의 반응이 이상하여 오가타가 슬쩍 그 이름을 불렀다.

 

 “…후지사키?”

 

 괜찮은 건가? 오가타는 걱정하였다. 입가를 가린 키요시의 손이, 때문에 유일하게 보이는 키요시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기에. 그러나 이내 안심했다. 시선은 계속해서 바둑판을 향해 있었고 이전과는 달리 울 것처럼 보이지도, 곧장 복기를 시작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 표현은 명백하였다. 한계까지 수를 겨루었을 때의 환희. 오가타의 입가에 씩 미소가 걸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스럽겠지?”

 

 어찌보면 자만스럽기까지한 오가타의 말에 키요시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가타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이번엔 제대로 검토해보자고. 지금까지처럼 대충하지 말고.”

 

 그 말에 키요시의 시선이 처음으로 바둑판에서 떨어졌다. 오가타를 향하는 키요시의 까만 눈동자에선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이내 키요시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확인하고 오가타는 다시 돌을 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며 가볍게 입을 떼었다.

 

 “저녁은 내가 사지.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

 

 “초밥이요.”

 

 어느 때보다도 빠른 대답에 오가타가 잠시 멈칫했다. 이 녀석, 잊고 있었는데.

 

 “…그래.”

 

 먹을 걸 참 좋아했지. 오가타가 미묘한 표정으로 키요시를 흘겼다. 문득 오가타는 녀석이 싫어하는 음식이 있을까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웠다. 복기하는데 별로 필요한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고마워, 신도우. …히카루라고 불러도 돼?”

 

 히카루는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매사 무뚝뚝하거나 퉁명스럽기만 했던 친구가 먼저 이름을 부르길 청해온 것이다. 주는 것도 매번 거절하는데다가 말 붙이기도 어렵고, 살가운 데라곤 없는 녀석이었는데! 오늘은 심지어 저가 주는 게임CD도 큰 거절 없이 받아들었고 말이다! 몇 년만에 마음을 연 것 같은 그 행동에, 히카루는 벅찬 마음이 들었다. 그간 친해지려고 노력한 결과가 이제야 결실을 맺은 것일까, 아니면 얼마 전 기성전에서 오가타 선생님과 둔 대국이 키요시의 심경에 변화를 준 것일까? 후자라고 생각하면 조금 씁쓸했지만 기쁜 것은 변함 없었다.

 

 “그럼 나도 키요시라고 부른다?”

 

 들뜬 히카루의 말에 키요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히카루는 환하게 웃었다. 아싸, 아키라보다 먼저 이름 불렀다! 다음에 만나면 꼭 자랑해야지. 히카루가 홀로 시시덕거렸다.

 

 

 

 

 이번 기성전은 이전의 여타 타이틀전과는 달리 치열한 방어전이 펼쳐졌다. 제 1국부터 키요시의 패배로 시작된 대국은 전에 없이 아주 박빙의 승부가 연속되었기 때문이다. 제 2국은 다시 키요시의 승리가 되었지만 제 3국의 이튿날인 오늘, 또다시 키요시의 패배가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키요시의 얼굴엔 어둠이란 없었다. 오히려 밝았다. 떨리는 손을 숨기지 못한 채 미소짓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렇게나 좋을까. 패배했는데도 밝은 그 표정에 오가타가 너털한 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후지사키 키요시에게는 홀로 승승장구하는 것보단 동등하게 대국하는 것이 더 좋은 걸 테지. 물론 패배하면 더럽게 기분이 안 좋아지는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마는. 동등한 대국이 기쁘다… 글쎄, 계속해서 진다면 그것도 언제까지 갈지. 오가타가 자신감 가득한 속마음을 뒤로한 채 입을 떼었다.

 

 “오늘도 저녁 안 먹고 갈 거냐?”

 

 오가타는 제 2국에서 키요시 본인이 이겼을 때, 함께 식사하자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젓고 홀로 사라진 키요시를 떠올리며 물었다. 이번에는 기분이 좋은지 곧장 답이 날라왔다.

 

 “먹을래요.”

 

 오가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오늘도 초밥은 아니겠지?”

 

 농담처럼 꺼낸 이야기에 키요시가 멈칫했다. 덩달아 오가타도 행동을 멈추었다. 조용해진 것이, 왠지 정곡을 찌른 것 같아 오가타는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그래… 먹고 싶은 걸로 먹어라.”

 

 초밥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오가타는 다른 것에는 무심하면서 먹을 것에 그렇게 일희일비하는 키요시가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키요시, 어제 오가타 선생님한테 진 것도 풀 겸…!”

 

 “히카루. 또 바둑을 두자고 하려는 거면.”

 

 투닥이며 이어지는 히카루와 키요시의 대화에 아키라가 끼어들었다.

 

 “나 빼고 언제 이름을 부르기로 한 거야?”

 

 히카루와 키요시가 하던 것을 멈추고 아키라를 돌아보았다. 씩 웃는 히카루와는 대비되게 키요시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너도 불러.”

 

 앗, 이렇게 쉽게? 히카루가 억울한 표정을 짓는 사이 아키라는 머뭇거리며 키요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키요시…? 그럼, 나도 아키라라고 불러줘.”

 

 희비가 엇갈린 얼굴로 아키라와 히카루가 키요시를 바라보았다. 키요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았어, 아키라.”

 

 거절할 줄 알았는데! 히카루가 울상으로 키요시를 보았다가 그래봤자 제게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걸 알기에, 잠시만 투덜거리기로 했다. 그런 히카루를 알아챈 것처럼 키요시가 툭툭 팔을 쳐왔다. 알았어! 안 칭얼거릴게! 히카루가 속엣말을 삼키며 아키라에게 말했다.

 

 “나도 아키라라고 부른다?”

 

 “그래. 나도 히카루라고 부를게. 우리가 안 지도 벌써 꽤 됐네. 12살에 처음 만났었지?”

 

 뚱해있던 히카루가 아키라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게? 지금… 곧 성인이 되니까 정말 오래됐구나, 우리!”

 

 신기한 마음에 히카루의 입에서는 절로 밝은 음성이 나왔다. 아키라가 히카루를 보고 마주웃었다. 히카루는 어느새 저가 뚱했던 것도 잊고 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키요시도 아키라도 소중한 친구이니만큼, 뚱한 마음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히카루는 인정했다.

 

 “참, 기성전 끝나고 십단전 있지? 그거 이번 도전자는 내가 될 것 같아, 키요시!”

 

 히카루가 신이 나서 말했다. 키요시가 그런 히카루를 마주보며 설핏 웃었다. 그것을 발견한 아키라가 앗, 하는 사이 그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그 웃음을 아키라가 보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처럼 키요시가 손으로 슬쩍 얼굴을 감싸쥐었다.

 

 “참, 아직 기성전이 안 끝났구나. 이번 주 수요일이지? 힘내. 꼭 이겨. 오가타 선생님을 화끈하게 이겨달라구!”

 

 그것도 모른 채 히카루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호탕하게 외쳤다. 키요시의 입가에서 짧은 숨이 터져나왔다. 웃은 건가? 웃은 거겠지? 히카루와 아키라가 마주보며 속닥이곤 씩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 저를 보며 입을 떼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는 생각했다.

 

 “다음 대국에서.”

 

 과연 저 입은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열린 키요시의 입은 오가타가 기다린 것이 무색하게도 제대로 끝맺어지지 않았다.

 

 “아닙니다. 복기 계속해요.”

 

 무언가를 삼켜낸 키요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빠른 속도로 복기를 시작하였다. 막힘없이 수를 두는 키요시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아, 오가타가 작게 탄식했다.

 

 자신의 실착이 있던 곳이다. 오가타는 쓰게 웃으며 그 옆에 돌을 얹었다.

 

 “그래. 그 수도 좋아. 만일 내가 그렇게 두었다면….”

 

 키요시의 손이 다음 수를 이었다. 단 한 수로 인해 승패가 엇갈린다.

 

 “어쩌면 오늘의 승패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군.”

 

 바둑이란, 참으로 신묘하고 심오한 것이었다. 그만큼 한 시라도 방심했다간 목이 날아간단 이야기다. 오가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자칫하다간 방심하지 않더라도 후지사키 키요시를 상대로는 오늘처럼 눈깜짝할 새에 당하고 말 테지만…….

 

 

 

 

 저가 십단전 도전자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한 히카루의 말과는 달리 아키라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시무룩한 히카루에게 키요시가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우리집에 가서 게임할래?”

 

 그가 먼저 말을 걸다니 드문 일이었다. 평소라면 반겼겠지만 히카루는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고개를 저었다. 잠시 말이 없던 키요시에게서 의외의 제안이 이어졌다.

 

 “그럼 나랑 대국하자.”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히카루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요시를 올려다보았다. 키요시는 못마땅한 음성으로 뚱하니 말했다.

 

 “공식이 아니라도 두면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키요시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이 나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히카루가 벙찐 얼굴로 키요시를 바라보는 사이 키요시는 한숨을 내쉬곤 바둑판과 돌을 준비했다. 그제야 키요시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깨달은 히카루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 대국하자, 키요시!”

 

 뒤늦게 도착한 아키라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조금 전의 히카루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먼저 대국을 하자고 하다니. 이제는 또래와의 대국이 두렵지 않아진 것일까?

 

 아키라의 눈앞에는 이전의 키요시가 선명히 떠올랐다. 자신에게 대국을 할 바에야 차라리 오목을 두겠다고 했던 것이나… 뭐, 어찌보면 무례하게 느껴지는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그게 모두 키요시만의 사연이 있어서였다는 것을 아키라는 알았다. 그 사연은, 키요시 특유의 기풍이 상대를 위축시키고 압살하는 것이 키요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도 있고, 그 때문인지 대등하게 둘 상대가 없어 많이 외로워했다는 것도 있고….

 

 ‘기대하라고 해. 제대로 이겨주겠다고 말이야.’

 

 아키라의 귓가에 오가타의 음성이 떠오른다. 기성전이 있을 무렵 오가타가 아키라에게 키요시에게 전해달라며 했던 말이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처럼 키요시를 거의 처음으로 ‘상대와 대등하게 둘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상대가 오가타 본인이 되어서 말이다.

 

 그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아키라는 묻고 싶었다. 이제는 바둑을 두는 게 무섭지 않은 거냐고. 하지만 집중한 듯 히카루와의 대국을 두고 있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키요시의 모습에 아키라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바둑을 두는 키요시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걸렸고 그 눈에는 어두운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 옛날에 키요시가 바둑을 둘 때는 볼 수 없었던 표정, 그러니까 전에 없이 즐거워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제 외롭지 않아보였다. 아무래도 오가타 선생님 덕이겠지. 좋은 일이었지만 아키라는 못내 아쉬웠다. 대등하게 둘 수 있는 상대로 가장 먼저 자신이 되지 못한 것이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둘 기회는 많을 테니 괜찮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먼저 두자고 한 것을 보면, 바둑 두는 것이 두렵지 않아진 거 같으니 이제 언제든 거리낌없이 대국신청을 할 수 있을 테다. 아키라의 시선이 한참이나 히카루와 키요시를 향했다.

 

 아키라는 알았다. 키요시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

 

 그것은 바둑을 사랑하는 이의 것이었으므로, 또 그것은 아키라 또한 마찬가지였으므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패승패승승, 기성전 제 5국까지의 기록이다.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방어전의 승부가 코앞에 다가왔다. 제 6국의 이튿날, 이제는 빽빽해진 바둑판 앞에서 오가타와 키요시가 치열하게 맞붙었다. 한 수 한 수 이어질수록 누구의 승리가 될지 예상치 못할 그 상황에서, 마지막 수를 두려던 키요시의 손이 돌연 멈추었다.

 

 들었던 돌을 다시 돌그릇에 내려놓으며 키요시가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오가타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키요시는 마지막 수를 분명 정했고, 둘 수 있었다. 분명, 분명히 그 마지막 수를 두려고 했단 말이다. 그런데 두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봐준 것처럼.

 

 오가타가 까득 이를 악물었다. 일부러 봐주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잔뜩 화가 난 오가타가 한 것은 빠르게 복기를 마치는 것이었다. 키요시가 복기할 때만큼은 자신이 두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는 했고, 또 다음 수로 어떻게 두었을 때 상대를 간파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는 했었으니까.

 

 그런데, 알려주지 않았다.

 

 알아서 알아보라는 건가, 잠시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아예 안 두려던 것도 아니고 키요시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는 것은 정말이지 그 쪽에서 먼저 대국하자고 하는 것만큼 말도 안 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게 얽혀가던 오가타의 머릿속이 순간 굳었다. 옆에서 아키라나 히카루가 쫑알쫑알 시끄럽게 굴었지만 오가타는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무심결에 베어물었던 담뱃가지를 툭 떨어뜨렸다. 오가타의 머릿속에 가장 정답에 가까운 가설이 떠올랐다.

 

 한 번 더 두고 싶다던가,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믿기지는 않지만 그것 말고는 말이 되지 않았기에 오가타는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허, 참. 조금 전까지만해도 화가 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황당함에 가까운 복잡미묘한 마음이 들어찼다.

 

 

 

 

 “이번 대국에서 승부가 나겠구나.”

 

 싱숭생숭하던 속을 가라앉힌 채 오가타가 말했다. 제 6국에서 패하는 바람에 3 대 3 동점. 하여 제 7국까지 온 상황이었다. 자신의 안경너머로 마주한 키요시의 눈동자는 빛이 났다. 결단코 이런 식으로 빛이 난 적은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키요시는 무언가를 앞에 둔 것처럼 견고한 표정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중에 가장 가벼운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키요시의 말이 이어질수록 오가타는 자신의 가설이 점차 맞아들어가는 쪽으로 확신의 추를 기울었다.

 

 “이길 겁니다.”

 

 ‘이길 것’이라고 선포한 것은, 정말로 진심이란 것인가. 여지껏 ‘이겨달라’는 말만 들어왔던 오가타가 알 수 없는 환희에 휩싸였다.

 

 “그래. 하지만 녹록지 않을걸.”

 

 오가타가 덩달아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마주한 키요시의 눈동자와 오가타의 눈동자가 전에 없던 열기로 부딪혔다.

 

 “나도 제대로 이길 작정이니까.”

 

 데일 것처럼 뜨거운 이유는 제 속에서 우러나오는 호승심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 키요시의 전에 없던 눈빛 때문인가. 어찌되었던 ‘제대로’ 둘 수만 있다면 오가타는 좋았다.

 

 

 

 

 “역시 한 번 더 두고 싶어서 일부러 진 건가.”

 

 기성전의 마지막 대국이 끝나고, 오가타의 중얼거림에 키요시가 멈칫했다. 무언가를 말할동말동하는 것을 보며 오가타가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그랬군.

 

 “뭐, 상관없지. 마지막 대국은 만족스러웠으니 됐다.”

 

 지긴 했지만. 불퉁하니 오가타가 중얼거렸다. 전혀 상관 있는 말투였다.

 

 “아니, 안 되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괘씸해.”

 

 역시나. 곧장 끝맺지 못하고 오가타가 비뚜름하게 눈썹을 치켜떴다. 못마땅하게 팔짱을 끼고 키요시를 바라보고 있던 오가타는 다 정리되었던 바둑판 위에 도로 흑백의 돌을 늘어뜨려놓았다. 익숙한 대국이다. 저번에 두었던 기성전 제 6국이었으니까.

 

 “자. 여기서 이어서 둘까 아니면 자리를 옮길까. 후지사키. 선택해.”

 

 선택은 네 몫이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선택권은 없었다. 싫다고 해도 두라고 으름장을 놓을 거였으니까. 서슬퍼런 오가타의 말에 키요시가 얼굴을 감싸쥐며 입을 뗐다. 짧게 숨이 내쉬어지는 것이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다.

 

 “자리를….”

 

 자리를 옮기겠다는 말에 오가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절하면 억지로라도 데려가려고 했는데 번거로운 일이 줄었다. 걸음을 옮기자 밍기적거리며 따라붙는 키요시의 모습에 오가타가 혀를 차며 말했다.

 

 “굶기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싫은 티 내지 마.”

 

 정곡이었다는 듯이 멈춰서서 저를 보는 키요시의 까만 눈망울에 오가타가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숨기고 말을 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랑 밥 먹는 게 싫은 거면 알아서 먹고 다시 만나도 되고.”

 

 그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오가타는 그렇게 말을 던지고선 획하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장난으로 혀를 찼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지껏 사줬네.”

 

 뒤에서 답지 않게 어수선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을 무시한 채 오가타가 대국실을 빠져나갔다.

 

 “선….”

 

 분명히 들었다. 저를 부르려는 키요시의 음성을. 그러나 오가타는 벌써 발동해버린 장난기를 거두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각자 저녁 먹고, 본원으로 다시 와.”

 

 단호히 말하고는 완전히 대국실을 벗어났다.

 

 뒤에서 잠깐,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오가타는 무시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선 1층에 가만히 기대섰다. 곧이어 어둑어둑한 표정의 키요시가 띵동, 엘리베이터 도착음 소리와 함께 등장했다. 오가타 씩 웃었다. 진짜 갈 줄 알았나보지. 뒤늦게 마주친 키요시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미세한 변화가 웃겼다.

 

 “가자. 초밥이든 뭐든 사주마.”

 

 금세 기분이 회복된 것 같은 모양새에 오가타가 장난스러운 말 하나를 덧붙였다.

 

 “아니면 머리 잘 돌아가게 낫또라도 사주랴?”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키요시 앞에 드리워진 음식 중에 그가 손 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낫또라는 것을. 딱딱하게 굳는 키요시의 표정에 오가타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完]-

 

 

  


 

 

  

 

2021. 10. 4. 14:03